여호수아

여호수아강해 8

푸른 섬 2011. 7. 18.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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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라합과 아간


여호수아7장1-21


신의 과학이라는 책이 있어요. 아마 우리 젊은 친구들은 이런 책을 좋아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우는데 성경은 창조를 말씀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정말 맞는지 궁금하기도 하겠지요.



실상 진화론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역시 엄청난 믿음이 필요한 것을 알지 못하지요.


당연히 그런 줄 알고 믿어 버리지요. 물론 자신은 과학적으로 생각한다라고 하겠지요.



물론 학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요.


이런 부분에 대해 우리인간들의 궁금증을 잘 풀어준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 보면 상당히 도움이 되겠지요.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어떤 박사가 수많은 화석을 발견했어요. 1901년인가 그래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 사실을 숨겼어요.


이유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6만점에서 8만점 되는 화석을 발견했는데 이 자료는 진화론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자료랍니다.



그런데 이것이 80년 후에 공개가 되었대요. 그런데 아직도 학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고 진화론을 가르친데요.



흥미 있지요.



그런데 이 책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성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해도 십자가가 나올까요?


십자가 자체가 우리의 이성을 거부해 버립니다.


우리의 생각을 죄로 몰아 버립니다.



그러니 성경을 현대 과학사상과 맞춘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설득당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성경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사람에게 포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사람들을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자, 주님을 알수 없는 자로 규정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연구해도 결국 인간들이 연구한 성경해석의 결과, 하나님에 대한 연구 결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요.


그러면 이런 연구가 필요 없나요.


필요 있고 없고가 어디 있어요.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해요.



자기가 연구하고 싶으면 연구하면 됩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 중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갖고 6일 창조와 수억 년 지구역사를 연결 지어요.


재미있지요.


중력이 크고 속도가 빠르면 시간이 느리게 간답니다.


그래서 주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6일 창조와 수억 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이게 말이 되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지구 땅 파고 들어가니 마그마가 펄펄 끓고 있더라 그곳이 지옥이다.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까?


그런데 인간의 몸이 그곳에 들어가면 녹아버리지요.



그러니 말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야겠지요.


그래 현재 과학과 6일 창조가 이런 식으로도 볼 수 있구나. 그런데 이것이 생명을 줄 수 있는가?


오히려 죄가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만 드러낼 뿐이구나.


십자가 지신 주님을 오히려 모독하는 구나를 깨닫는 자가 성도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사람 책에 여리고성이 언급되어 있어요.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하면 성경적 연대와 거의 동일하대요.


그러니 성경을 믿을 만하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성령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오늘 우리들이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본문은 6장22부터 7장26절까지입니다.


6장22절 이하에서는 기생라합에 관하여 나옵니다.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 주었기 때문에 기생라합과 그 부모, 그 형제, 그리고 친족,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심판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랄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에 의하면 이들은 무조건 진멸당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예외가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예외가 없습니다. 진멸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지요.



하나도 남김없이 싹 다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신명기20장17절을 보면 “곧 헷 족속과 아무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대로 하라”


진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제외 되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제외 되었습니까?


정탐꾼을 숨겨준 이유로 제외 되었습니다.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제외되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야고보서 2장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함께 봅시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참으로 희한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무엇이 희한하냐?


지금 이 말씀에 의하면 행함을 인정해 주시는 말씀 같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기생라합의 행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유입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인간의 행함은 다 인정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기생 라합이 진멸의 대상이었는데 그의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어 구원을 얻었다면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내용을 살펴보면 여리고성을 진멸하고 아이성을 공격했습니다.


물론 여리고성과 비슷하게 합니다.


정탐을 먼저 실시합니다.



정탐꾼의 보고가 무엇입니까?


아이성은 작은 성입니다. 그래서 이삼천명만 올라가서 쳐도 금방 차지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삼천 명이 올라갔다가 아이선 사람들에게 36명이 죽습니다. 그리고 도망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내용 아닙니까?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우리들 생각에는 또 규칙을 집어넣으려고 하지요.


왜 전쟁을 니 마음대로 생각해서 삼천 명을 보냈느냐?


좀 더 신중하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그게 아닙니다.


이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았습니다.


이 땅을 주께서 주신 것으로. 그래서 믿고 나간 것입니다.



아이성을 깔보아서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 마음대로 전쟁을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총력전을 하면 아이 성을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호수아도 몰라요. 왜 아이성 전쟁에서 패하고 이스라엘 마음이 물같이 녹아졌는지.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왜 내말 안 듣고 마음대로 아이성을 쳤느냐라고 책망하십니까?


왜 아이성을 깔보아느냐고 하십니까?


아이성 치는 방법을 알려줄 것인데 왜 듣지 않고 쳤느냐고 하십니까?



그런 것 아니지요.


11-1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


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인하여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말씀이 좀 어렵지요. 여리고성 전쟁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중 누군가가 전리품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전리품 모두는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에 참가한 사람 중, 우리는 알지요 아간이라는 사람이 전리품을 취했습니다.


이 사람이 왜 전리품을 취했습니까?



욕심이 생겨서. 옳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결정적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무리는 누가 했습니까?


아간이 했습니다.


그러니 전쟁의 공로가 아간에게도 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리품을 조금 취했는데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 바친 물건을 취한 자는 그 자신은 여호와께 바쳐야 되는 자다. 즉 진멸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여호와께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진멸을 여호와께 바친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을 거역하고 아간은 여호와의 것을 훔쳤습니다.



이게 뭐가 잘못이냐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기생라합을 봅시다.


그가 정탐군을 숨겨주었지요.


그래서 그와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의 행위로 말입니다.



그런데 아간은 여리고성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 댓가를 받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반드시 승리의 댓가로 전리품을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간에겐 이런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겐 이런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생라합에겐 행위로 구원 얻고, 아간은 행위로 그와 온 집안 그리고 그 집의 모든 것들이 아골 골짜기에 돌로 매장되었습니다.



이게 우리들이 보기에 자연스럽습니까 이상합니까?


처음부터 인간의 행위를 인정하시려면 끝까지 인정해 주시든지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시려면 인정하지 않으시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보기에 옳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왔다 갔다 하시는 것입니까?



아마 사람들의 상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이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기생라함의 행위는 어떤 행위인지 그리고 아간의 행위는 어떤 행위인지 좀 더 살펴봅시다.



기생라합은 자기 민족을 배반한 행위였습니다.


자기 집안 살자고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팔아먹은 것이지요.



왜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까?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수2장9-11



기생라합이 하는 말은 기생 라합의 말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아요.



그런데 기생 라합만이 구원을 얻었어요.


무슨 행위를 해서. 정탐꾼을 숨겨 두어서.



이것을 야고보서에서는 행함 있는 믿음이라고 해요.


다른 말로 하면 제대로 된 믿음이지요.



그런데 아간은 어떤 행위를 했나요.


전쟁에 참여 했어요. 그러면 전리품 취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아간은 이런 행위를 한 것입니다.


전쟁에 참여했으니 전리품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입니다.



분명 여호수아가 경고했어요.


6장18절입니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들릴까요?


안 들립니다. 이유는 자신의 행위가 있는데 이 말씀이 들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상하지요.


아간 한 사람만이 이런 행위를 한 것 말입니다.



아간 한 사람만 이런 일을 행했다는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편에 서서 자신의 행위를 인정해 달라고 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간은 자신 편에서 자신의 행위를 인정해 달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둘 다 자기를 위해 행동한 것 아닙니까?



이게 분간이 갑니까 분간이 가지 않습니까?


사실 분간이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기생라합은 이방인으로서 진멸의 대상으로서 자신이 믿는 바대로 최선을 다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아간은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있으면서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전리품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기생라합은 행함있는 믿음, 즉 참 믿음이라고 하고 아간은 돌매장 당했습니다.



기생라합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긍휼만이 살길임을 믿었어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었어요. 그래서 그 행위가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과 자신을 별개로 보았어요. 여호와의 긍휼도 필요하지만 나의 수고도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아간은 가나안땅 정복 전쟁을 여호와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전쟁으로 보지 않아요.



기생 라합은 이 전쟁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전쟁으로 봅니다.



그러나 아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에서 자신이 뭔가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이지요. 여호와의 전쟁이 자신을 위한 전쟁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20장28-30절을 봅시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서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여기에서 이리와 참 감독자가 등장합니다.


참감독자는 피만 전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만을 전합니다.


그러나 흉악한 이리는 무엇을 전합니까?


어그러진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나와 있지 않지요.



그런데 어그러진 말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좇게 하려고 무슨 말이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그러진 말입니다. 바른말도 하고 십자가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도 이야기 합니다. 기생 라합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 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감독자는 무엇을 전합니까?


피를 전합니다.



피만을 전하니 당연히 자기를 좇으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지요.


오직 예수님의 피 만을 사수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님이심만을 전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좋게 하고 사람을 좇게 하려는 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자기를 위해 이용할 뿐입니다.



설교 서론에서 제가 신의 과학을 잠시 언급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열심을 내어 성경을 과학과 대치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과연 피만을 전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그럴까요?



아간이 따로 없습니다.



흉악한 이리는 피를 거부합니다.


피 속에 자신이 잠기는 것이 짜증납니다.



그래서 자신의 것도 있어야 합니다. 챙길 것은 챙겨야 합니다.



기생라합의 행위는 십자가 지신 주님의 행위속에 포함되는 행위였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아간의 행위는 십자가 지신 주님의 행위와 병열관계로 있는 행위였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이것을 통해 주께서 주신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가 판가름납니다.


의롭다 여김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구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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