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 강해 9

푸른 섬 2011. 7. 24. 15:10

두 번째 아이성 전투

여호수아8장1-29

처음 아이성 전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상당이 얕잡아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 전투를 생각하면 아이성 전투를 쉽게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당연한데 패했습니다. 이유는 아간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아간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성 전투는 어떤 식으로 되어야 할까요?

물론 우리들이 이미 성경을 읽고 알기 때문에 쉽게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아이성 두 번째 전투내용을 모른다면 어떤 답을 내릴까요?

그렇습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당연히 쉽게 얻을 것이라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1,2절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ㄹ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뒤에 복병할 것도 명하십니다.

전쟁 방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전쟁방법이 성경이곳에만 나옵니까?

아닙니다.

삼국지를 읽어 보아도 나오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읽어 보아도 이 병법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병법이라해서 뭔가 특별한가 했더니 이 땅에 좀 한다는 장군들은 다 하는 병법이라 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뭔가 특별한 것, 우리들이 기대했던 것이 오늘 본문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 패해한 것을 이용해서 복병을 두고, 거짓 패하여 도망하는 가운데 성문이 열렸을 때 복병이 성읍을 점령합니다. 이제 아이성 군사들이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협공을 가합니다.

이 날에 아이 사람 일만 이천을 진멸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가 전쟁을 하더라도 똑 같은 방식으로 아이성을 점령했습니다.

단지 다른 점은 하나입니다.

진멸입니다.

왜 이렇게 진멸해야만 합니까?

그들을 살려두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무슨 원수가 졌다고 진멸해야만 하느냐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백성들 입장에서는 이들을 살려두면 좋지 않을까요?

살려 두면 쓸모 있잖아요.

그런데 모조리 다 진멸해 버립니다. 죽여 버립니다.

이런 행위야 말로 가나안 땅이 환영하는 행위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해 주어야 믿음으로 행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지요.

처음 아이성 전투를 패했지요.

아간 때문 아닙니까?

아간 때문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아간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 너무 엉터리로 봅니다.

아간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한번 볼까요?

누구만 제거하면 예수님 말씀에 합당한 제자들이 될까요?

베드로, 아니 가롯유다.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사람들은 자꾸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간을 제거했으니 이제 이스라엘은 깨끗해. 완벽해.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주신 것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지요.

아간의 등장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간과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전쟁방법까지도 일러 주시는 것입니다.

좀 유치하지 않습니까?

이제 아간을 제거했으면 그래 너희 마음대로 올라가라 아이성 줄께라고 하셔야 하지않겠습니까?

그런데 철저하게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여호와께서 아이성을 여호와의 말씀대로 진멸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말끼를 정말 못 알아들어요.

왜 그럴까요?

인간들은 자기 부인할 줄 몰라요. 왜 그런지 아세요.

첫째 아담 안에 있어서 그래요.

그러면 성령 받은 자는 그렇지 않을 것 아니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천만에요. 또 같아요. 그러나 성령 받은 자와 받지 않는 자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방금 제가 두 번째 아이성 전투를 해석해 드렸지요.

땅에서 전쟁하는 방식 그대로 전쟁하도록 하십니다.

병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 하나님 그런 병법은 저도 알아요.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 아는 병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아이성을 치게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여호와께서 말씀대로 말씀을 이루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너무나 인간적으로 전쟁을 하셨기에 오직 주님께서 말씀대로 말씀을 이루셨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 있지 않습니까?

이 생각은 죽을 때까지 불쑥불쑥 튀어 나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삶일까?

그런데 한번 보세요.

두 번째 아이성 전투에서 예수님을 믿는 모습이 어떻게 나옵니까?

전투하는 방법에서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까?

나오지 않아요.

이성계가 홍건적을 물리칠 때 이런 전법을 사용했거든요.

다른 말로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 같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하면 참으로 듣기 싫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얼마나 열심을 내는 모습이 많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르지 않다고 하니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설교 왜 들어요. 기도 왜 합니까? 찬양은요. 봉사는요? 헌금은요?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여기에도 제가 덧붙입니다.

왜 밥 먹습니까? 왜 숨 쉽니까? 왜 돈 벌어요? 왜 자식 낳고 키워요?

제가 왜 이런 것을 덧붙인 줄 아시지요.

방금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기도, 헌금, 봉사, 전도, 찬양으로 판단을 하려고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짓은 누가 다 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다 했어요.

목숨 걸고 전도한 사람들 아닙니까? 금식기도, 십일조.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까?

이런 것이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 기준이 될 수 없어요.

또한 자식 낳고 키우고, 돈 벌고, 자기 배만 채우고,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기, 자기 가족만 돌보기 이런 것도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정도 하면 제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없다는 말을 이해하셨겠지요?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는 절대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밥 먹고 진멸, 아이 낳고 진멸, 자식 키우면서 진멸, 헌금하면서 진멸, 기도하면서 진멸, 돈 벌면서 진멸, 전도하면서 진멸, 봉사하면서 진멸, 아내 사랑하면서 진멸, 남편 사랑하면서 진멸, 회사에 충성하면서 진멸.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 어느 누구 하나 제거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죽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긍휼의 그릇으로, 누구는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롯유다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팔아먹고 자살해 버립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자신이 진멸의 대상임을 늘상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가 정말 눈앞에 밝히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룟유다 같은 사람은 자신이 진멸의 대상임을 알아요. 그런데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안 보여요.

그러니 어떻게 할까요? 자살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자신 만만하다는 것이지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12절에 보면 할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할례 받게 하려는 의도가 무엇인가라고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십자가로는 약간, 쪼끔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육체로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우린 할례라는 말과는 상관없는 자들 아닙니까?

그러나 그 할례 하라는 그 마음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할례를 다른 말로 하면 법지 키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 지키기, 다른 말로 하면 성경말씀 지키기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본성이 지키기 선수입니다.

그래야만 자랑거리가 있게 됩니다. 떳떳합니다. 당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만 전한다는 핍박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다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할례행하는 것을 탓합니까?

아닙니다. 할례행하지 않는 것을 탓합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할례 갖고 할례를 십자가에 살짝 올려 할례를 자랑거리고 만듭니다.

헌금을 십자가에 올려 헌금을 자랑거리로 만듭니다.

기도를 , 전도를, 봉사를.

자식 낳은 것을, 지 새끼만 사랑하는 것을, 회사에 충성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모든 것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진멸입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도는 어떻게 살아도 십자가 밖에 안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세상 방식의 전쟁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지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다 주님께서 살게 하신 것이라 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6장7절을 봅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그러면 튀어 나와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튀어나와야 하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가 튀어 나오지 않고 사람이 튀어 나와요. 자기가 행한 행위가 튀어 나옵니다.

아이성 첫 번째 전투와 아간 그리고 아이성 두 번째 전투를 동시에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따로 봅니다.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순종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없어요.

왜 없는지 아시겠지요. 따로 만드는 즉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오히려 성도의 모든 삶이 십자가만 전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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