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강해 10

푸른 섬 2011. 8. 14. 17:31

에발산

여호수아8장30-35

신명기27장2-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

한 구절 더 찾아보겠습니다.

신명기 11장29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 말씀을 말씀대로 온 이스라엘이 그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방인까지도 이렇게 행했다고 합니다.

참 놀라운 사실은 축복 산에 절반 저주산에 절반씩 올라 축복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말이 낭독이지 사실은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요, 저주를 선포하는 것이지요.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가 주어지고, 말씀대로 살면 축복을 받게 될 것을 누구도 피해갈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의 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저주 산에서 퍼부어 지는 저주의 말씀을 싫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저주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즉 에발 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축복을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 저주가 말씀대로 축복이 주어집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축복과 저주가 퍼부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지요.

먼저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돌들을 어디에 세우라고 합니까?

에발 산에 세우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지요.

돌단을 세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은 사람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돌은 안 됩니다.

자연석을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뭘 하라고 하십니까? 번제를 드리고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 하는 일이 에발 산에 절반, 그리심 산에 절반 축복과 저주를 퍼붓습니다.

제가 이상한 것이 있다고 했는데 무엇이 이상한지 알아 차렸습니까?

축복과 저주가 무엇으로 결판납니까?

율법이지요.

율법을 지키면 축복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들은 율법의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번제와 화목제로 인해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23장20,21절을 봅시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발람선지자가 발락 왕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축복하신 이스라엘을 바람이 저주할 수 없도록 여호와께서 조치하셨습니다.

발람선지자가 타고 가는 나귀를 말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발람 선지자 수준이 나귀 수준, 즉 짐승 같은 놈으로 규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짐승인 나귀보다 못한 자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발람이 자기 마음대로 저주를 내 뱉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저치 않으신 자를 자신이 저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꾸짖지 아니하신 자를 자신이 꾸짖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시 모압왕 발락이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이때 한 말이 민수기23장20,21절 말씀입니다.

민수기23장20,21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어떤 자들이라는 말입니까?

발람선지자가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당연히 저주받을 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저주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은 의외입니다.

정반대입니다.

축복의 명을 내려버립니다.

여호와의 축복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그런가?

허물이 없어서 그런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이들은 허물이 있어도 패역이 있어도 축복을 받습니다.

이들이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패역이 있어도 저주가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에발산과 그리심 산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이 에발산과 그리심 산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번제와 화목제에 있었습니다.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번제 화목제 앞에 무엇이 있습니까?

율법이 있지요.

율법에 근거하면 이들은 축복받을 자격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근거하면 이들은 저주받아야 마땅한 자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사실은 에발 산, 즉 저주가 퍼부어지는 산에 단을 쌓는다는 사실입니다.

특이하지 않습니까?

보통 우리 인간의 상식으로는 축복이 나오는 곳에 단을 쌓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기 축복의 산이 있다. 그리고 저쪽에 저주의 산이 있다.

어디에 서고 싶습니까?

물론 우리들은 축복이 나오는 산에 서고 싶지요.

제단도 그곳에 쌓고 싶고요.

그런데 축복이 나오는 곳에 오히려 저주가 퍼부어집니다.

저주가 나오는 곳에는 축복이 퍼부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축복이 임할까요?

바로 제단 때문입니다.

율법에 근거하면 축복받을 이유가 없어요.

축복의 산에 있던 저주의 산에 있던 모두가 다 저주밖에 떨어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주의 산, 에발 산에 있는 단에서 드려진 번제와 화목제로 인해 축복의 산에 있던 저주의 산에 있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축복의 산에 있다고 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켜야 축복을 받지요.

저주의 산에 있다고 해서 저주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면 축복을 받아요.

그런데 축복의 산에 있던지 저주의 산에 있던지 율법을 지킬 인간 없어요. 온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을 지킬 인간이 없어요.

그러니 모두가 다 율법에 근거하면 저주받아야 하는 자들임이 들통 날 뿐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축복이 임한다는 것은, 즉 가나안 땅에 들어와 지금 이 땅을 차지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화목제물 되신 왕으로 인해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좀 이상한 논리를 펴십니다.

3절부터 12절을 보면 우리들이 잘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여기까지는 우리가 그럭저럭 이해할 만한 말씀이지요.

그래 복 받으려면 이렇게 살아야지. 예수님 말씀 들어야지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11절에서 갑자기 예수님 자신 이야기를 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것과 위의 말씀이 연결성이 있습니까?

연결성이 없어요.

만일 연결하려면 이렇게 연결할 수 있지요.

예수님을 위해 핍박받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온유한 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요, 긍휼히 여기는 자요 마음이 청결한 자요 화평케 하는 자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하면 문장이 연결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하는 것, 온유한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긍휼히 여기는 것, 마음이 청결한 것,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다 엉터리가 됩니다.

다르게 표현해 볼게요.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한 것, 온유한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긍휼히 여기는 것, 마음이 청결한 것,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 말씀과 수준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은 수준이지요.

그러니 우리 인간이 열심히 노력해서 지켜야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이 질문자체가 틀렸지요.

말씀을 지킬 수가 없어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린 피조물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지킬 수가 없어요. 차원이 달라요.

땅에 있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허물 있는 자요 패역한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왕되신 분의 화목제물 때문이라고 했지요.

로마서 3장23-28절을 봅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이 화목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31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5장에 나오는 말씀과 일치된 말씀이지요.

그러니 인간들의 상식적인 언어 이해로 , 문장 이해로 말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5장에 의하면 인간은 저주받아야 마땅한 자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받습니까?

로마서 3장에 의하면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위해 핍박받는 자가 창조됩니다.

이들은 화목제물 되신 왕이신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이렇게 되면 축복 산에 있는 자들, 저주 산에 있는 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내가 축복받는 것은 율법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주 받는 것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들은 화목제물 되신 왕이신 예수님이 소용없어요.

오직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축복과 저주가 갈라진다고 생각해요.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그래요. 자신들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왜 이렇게 복잡하게 돌을 취하고 율법을 기록하고 단을 쌓고 번제, 화목제를 드리고, 에발산 그리심산에 올라가 축복과 저주를 선포해야 합니까?

이 모든 행동들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이 저주아래 놓여 있는 자요 오직 화목제물로 인해 축복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가 그렇습니다.

이 땅에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성도의 행동들은 축복과 저주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전하는 도구입니다.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으로 인해 축복과 저주가 갈라짐을 전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을 해도 주님의 피공로만 앞장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축복과 저주를 가져다주지 못함을 제대로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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