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강해 12

푸른 섬 2011. 8. 28. 17:09

태양이 머물고

여호수아10장1-15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전도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없는 사람이 없겠지요.

아니면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식으로 전도를 합니까?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친구나 지인을 교회로 초대하여 선물을 주는 방식도 있고 아니면 길거리에서 커피나 차를 나누어 주면서 전도지를 나누어 줍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행동을 올바르게 해서, 소위 예수님을 믿는 자로 본을 보여서 전도하려고도 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교회 온 사람들도 많지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전도를 합니다.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 아닙니까?

무슨 도를 전합니까?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이지요.

그런데 과연 십자가의 도가 이런 식으로 전해도 되는 가입니다.

이런 방법이 십자가의 도의 정신에 부합하느냐 말입니다.

디모데 후서4장2절을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핵심적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말씀이지요.

말씀은 즉 십자가 복음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파하기 위해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사도행전으로 옮겨가면 어떻습니까?

주변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 되어도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4장1-3절을 보면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가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 까지 가두었으나”

이런 주변 상황이 성령 받은 사도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스데반인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옥에 가면 감옥에서 전하고 나오면 나오는데서 전하고 회당이면 회당에서 거리면 거리에서 전할 기회만 되면 전했습니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전함에 있어서 어떤 환경도 바울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영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걷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분위기 파악도 못합니다.

오히려 분위기를 이용할 뿐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범사에 오래 참을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참음이 발생한다는 것은 주변 환경이 어떠하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도를 싫어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싫어하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핍박하고 관계를 끊어버리고 비난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을 범사에 오래 참으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물론 바울이 오래 참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조차도 주님께서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린 이미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가르칩니다. 십자가의 도로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라는 말입니다.

책망의 질이 다릅니다. 훈계의 질이 다릅니다. 격려의 내용이 다르지요.

물론 책망과 경계와 권하는 것은 받을 자만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4장3,4절을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십자가의 도가 바로 바른 교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받지 않습니다.

이유는 귀가 가려워요. 십자가의 도는 듣기 싫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사욕을 채워줄 교훈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십자가에 도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을 갈라디아서로 가져 가 보면 이렇게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6장11절 이하를 보면

십자가는 핍박을 몰고 옵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전할 경우 핍박이 오니 할례도 행하자라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만 말하지 말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을 행하여 믿는 자의 표를 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무엇이 없다는 말입니다. 핍박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지지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2장을 보면 십자가의 원수의 모습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십자가로 승리한 것을 부정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 모습이 어떤 행함인고 하면 먹고 마시는 문제를 논하는 것입니다.

절기 지키기, 월삭 지키기, 안식일 지키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겸손입니다.

그리고 천사 숭배함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고 하면 18절 하반절 19절 상반절입니다.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지라 ”

요즘도 이런 사람 많잖아요. 꿈에 보았니,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니 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고 하면 그 본 것을 의지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체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말씀은 자신이 체험하지 않았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육체의 마음을 좇아 그 본 것에 근거하여 헛되어 과장한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마음, 즉 지옥갈 자들의 마음은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마음이 내어 놓는 행위가 사람들이 볼 때 지혜 있는 모양입니다.

인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예배, 그리고 겸손, 금욕주의.

이런 것들이 나쁩니까 나쁘지 않습니까?

요즘 교회 보면 예배가 가지 각색 아닙니까?

이런 것들이 사람들이 볼 때에는 너무나 받아들일 만하고 지지할 만한 행위들 아닙니까?

그런이 이런 모습과 무엇이 상극을 이룹니까?

즉 원수가 되느냐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와 원수가 됩니다.

이런 것 백날해도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겸손한 것, 남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것, 금욕하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가르칩니다.

이런 짓은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십가가의 도를 받은 자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내어 놓지를 않습니다.

바울 서신 같은 성경을 이해할 때 사도행전 속에서 이해해야 하고, 또한 사복음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이 행한 것을 말하고 전합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도 만을 전합니까?

십자가의 도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곁에 붙어 있지를 못하지요.

십자가의 도도 전하고 겸손, 예배, 금욕, 절기 지키기, 십일조 하기 등등을 함께 가르쳤더라면 얼마나 쉽게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겸손, 예배, 금욕, 절기 지키기, 십일조로 얼마든지 바꿔치기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겸손, 예배, 절기 지키기, 십일조 하기는 인간들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육체의 탐욕과 일치성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든지 받아들일 만합니다.

결코 핍박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배 열심히 드리고, 십일조 하고, 절기 기키고, 금욕하는데 누가 핍박을 합니까?

물론 핍박하는 자가 있지요.

그들이 핍박하는 이유는 십자가의 도 때문에 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가 자신의 마음에 안들기 때문에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핍박도 육체의 사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과 불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과 스데반이 핍박받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행동을 잘해서 핍박받았습니까?

행동을 못해서 핍박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행동을 잘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행동을 못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오직 십자가의 도만을 전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의 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상설교를 가르쳤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아니면 이웃 사랑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너무나 모범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십자가 지셨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본이 안 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자임이 무조건 싫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예수님을 피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들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예배, 겸손, 십일조, 금식, 이웃사랑 등등이 다 부정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전도란 이런 것이지요.

상대가 발악을 하도록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좋게 말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기브온 거민이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연합군을 결성하여 배신자 기브온을 치려고 합니다.

연합군을 결성한 이유는 기브온이 왕도와 같은 큰 성이고 아이성보다 크고, 다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브온 거민들이 길갈에 진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유는 도와 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와주었고 승리합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나”

또한 11절에서는 큰 우박덩이가 내려 원수들을 죽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태양까지 멈추게 하셔서, 즉 온 우주의 운행을 정지시키면서 까지 이들을 죽이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너무 째째한 분 아닙니까?

도대체 이들이 무슨짓을 했다고 원수로 규정하시고 우주를 멈추시고 이들을 진멸하셔야 하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이들의 죄 때문입니다. 창세기15장16절을 보면 죄악의 관영하면 즉 죄가 꽉 차면 이들을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온 우주를 멈추게 하셔서 이들을 진멸시키시는 이유는 죄악의 꽉 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무슨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원수제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이스라엘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전혀 손댈 수 없는 태양을 멈추게 하셔서 자신들이 할 일, 즉 여호와의 원수를 진멸하는 일에 동원된 것입니다.

태양을 멈추게 해서 회개케 하지 않습니다. 큰 우박을 내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양을 멈추게 하시고 큰 우박을 내려 진멸하십니다.

누가복음12장4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불을 땅에 던지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즉 심판 하신다는 말씀이지요. 갈라낸다는 말입니다.

분쟁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10장과 역전현상이 일어납니다.

분쟁을 일으키는데 누가 누구를 핍박합니까?

누가 이깁니까?

주님의 원수가 이깁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니 당연히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전하게 되면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희들은 우주를 멈추게 해서라도 진멸 받아 마땅한 자들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십자가의 도에는 우주를 멈추게 해서라도 태양을 멈추게 해서라도 십자가의 원수를 반드시 진멸해야 한다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즉 지옥 보낼 자는 반드시 지옥 보내며, 원수 되었든 자라도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은 반드시 영생을 주시는 분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참 성도는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기 때문에 십자가로 인해 핍박 받습니다.

그러나 거짓 성도는 십자가의 도도 전하고 사람의 탐욕도 함께 제공해 줌으로 십자가로 인한 핍박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미움 받을 수는 있겠지요.

이런 것은 다른 종교들 간에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성도의 삶이 여호수아 10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대단한 삶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이 나올까를 생각한다면 주님의 전쟁이 아닙니다.

주님의 전쟁은 그야 말로 주님의 전쟁입니다.

성도는 이 전쟁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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