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 강해 13

푸른 섬 2011. 9. 4. 15:07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수아10장16-43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하고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할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차이가 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오늘 본문을 말하면 뭐라고 말할까요?

과연 오늘 본문이 이 사람이 말하는 그 차별성을 보여 줄까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이 잔인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과연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까?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야 구약이고.

그러면 이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믿는 사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까?

이런 여호와 하나님이 성도가 믿는 예수님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유만으로, 가나안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은 다 진멸당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여러분들이야 이런 말씀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공자가 꼭 지옥가야 합니다.

석가모니가 꼭 지옥가야 합니다.

어느 나라치고 나라의 영웅이 없는 나라가 없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꼭 지옥가야 합니다.

너무 거리가 머나요?

나의 남편 아내가 지옥가야 합니다.

내 딸, 내 아들,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지옥가야 합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린 뭐라고 말할까요?

저는 빼 주시고, 제 딸, 아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남편은 좀 빼주세요. 이런 마음 들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무슨 그런 하나님이 있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옥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반드시 지옥가야한다. 진멸의 대상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임을 모릅니다.

자신 같은 사람은 천국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볼 때 너무 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진멸의 대상임을 아는 자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받은 자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진멸의 대상임을 압니다.

그러나 성령이 없다보니 진멸의 대상임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꾸 비교 대상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옆에 있는 죄인을 비교 대상으로 둡니다.

그러다 보니 본을 보여야 하느니라.

행위가 있어야 하느니라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요즘 우리들이 여호수아서를 보고 있잖아요.

도대체 무슨 본을 보여야 합니까?

다 죽여야 합니다.

이게 과연 본이 되겠습니까?

나무에 목 매달아 걸어 놓습니다.

이게 주변국들에게 본이 되는 삶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어찌되었든지 믿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상을 섬기는 이방국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살펴보았지요. 어떻게 하나님 백성으로 들어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를 써서 본을 보였기 때문에 들어 옵니까?

지난주 기생라합과 기브온 거민들을 보았지요.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으로 들어 왔습니까?

이스라엘의 본이 없었습니다.

전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다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는 경로로 구원을 얻습니다.

누가복음23장44-47절을 한 번 봅시다.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참으로 희한한 일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모습이 과연 백부장의 믿음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까?

이게 과연 본이 되느냐 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20장31절을 봅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다 알겠지요.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으로 막상 들어가 보면 이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 나오잖아요.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땅의 언어이지요.

그래서 그는 육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인자되신 예수님,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주님이 되셔서 성령을 주실 때 그 성령을 받는 자들만 영생을 얻습니다. 이런 자가 거듭난 자입니다.

그러니 출발은 자기에게서 출발했지만, 간절함이 있었지만 영생은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이 구원해 주셔야 거듭납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백날 성경공부해도 헛방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요한복음20장31절 말씀은 인간들을 무시해도 이만저만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진멸한 그 가나안 백성들과 똑 같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다 진멸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언어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증거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성도들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셨습니다라고 외치니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연결고리를 찿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더라라고 말입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지요.

바로 사복음서입니다.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이런 식으로 연결고리는 전혀 허용치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척척 진행되어집니다.

인간의 말은 백날해도 헛소리에 불과함이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삼년동안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다고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기에 훌륭한 베드로 같은 제자가 나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본을 보여 제자를 만들자라는 의도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성경을 모르면 이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그러면 가룟유다는 뭡니까?

가룟유다에겐 본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본을 보였습니다.

차별 없이 교육했습니다.

능력도 주셨습니다.

회계 직무도 맡겼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먹고 자살합니까?

그러면 그렇게 본을 본 베드로는 왜 맹세하고 저주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합니까?

사람들은 이 이유를 몰라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결될 인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인간 만들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되심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려면 인간들은 구제 불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진멸대상이야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젠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자랑해라는 말입니다.

성령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자들이 있지요.

그러니 사복음서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왜 여호수아가 있는지, 왜 구약성경이 있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사복음서는 구약성경의 재탕이라 보시면 됩니다.

재탕이라고 하면 좀 그렇습니까?

구약성경전체를 모아모아 그 엑기스를 보여주는 것이 사복음서입니다.

성령 받으면 안됩니까라는 생각도 이미 구약성경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디 있냐고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주어 졌습니다.

이들이 율법을 어떻게 대할까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별개로 대할까요?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율법을 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태도가 누구를 죽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대할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보이지 않아요.

여러분도 한번 보세요. 지켜라고 되어있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믿으라고 어디 있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용납하라. 사랑하라. 겸손하라, 나보다 남을 더 귀하여 여겨라. 형제를 사랑하라.

이런 말씀들이 십자가의 피를 믿으라고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고린도 전서6장9-10절을 보세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백이면 백 모두가 이런 마음이 들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게 첫 아담 안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절대로 이런 마음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는 관점은 누구의 관점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의 관점이요 유대인들의 관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노선이 여러 가지가 생기지요.

예수님을 믿는 노선과 이 말씀을 지켜야 하는 노선 말입니다.

물론 말씀들도 여러 갈래고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말씀은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까?

여러분 성경은 왜 필요합니까?

구원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지요.

맞는 말이지요.

그러면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성경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바로 지옥 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성경은 당연히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바로 성경이 헷갈리는 이유입니다.

성경을 접근할 때 인간구원론으로 접근하니 성경이 헷갈린다는 말입니다.

즉 이렇게 접근하는 자들을 다 지옥 보내시기 위해서 성경을 이렇게 기록하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있다고 부추기는 말씀이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을 보여야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겠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는 사고방식은 그야 말로 성경이 의도한 대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도록 잔인하게 진멸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멸당해야 하는 자들은 당연히 진멸당해야 하고 구원받을 자들은 반드시 구원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3장23-24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렇게 사람들을 한꺼번에 몰아갈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도 있고 바울도 있는데 말입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아브라함도 들어가고 바울도 다 들어갑니다.

자꾸 빼 버리려고 해요. 아브라함, 바울을 언급하는 이유는 자신도 그 속에 집어 놓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어느 누구도 피해 갈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믿는 자입니다.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배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잔인한 예수님을 아는 자입니다.

진멸의 전쟁이 당연함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자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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