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 강해 4

푸른 섬 2011. 6. 19. 15:36

언약궤와 요단강

여호수아3장1-17

요술방망이, 도깨비 방망이를 싫어할 어린이 없겠지요.

어른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동화책에 보면 혹 떼고 도깨비 방망이 얻어 부자 된 할아버지가 나오잖아요.

얼마나 부럽습니까?

물론 혹 떼려다 혹 더 붙인 욕심쟁이 할아버지도 나오지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왜 욕심이 생겼느냐는 말입니다.

왜 혹을 하나 더 붙이게 되었느냐 말입니다.

혹뗀 할아버지, 부자 된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겠지요.

사람들은 이 동화에서 혹떼려도 혹 더 붙이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 그렇잖아요.

우린 혹 하나 더 붙은 할아버지처럼 될까 두려운 것이 아니지요.

우린 혹 떼고 부자 된 할아버지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욕심 부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동화책일 수 있지요.

그런데 한번 보세요.

욕심 부리지 않게 생겼나요?

혹도 떼고 부자 된 할아버지..

우리의 꿈이요 소망이요 희망이 아닙니까?

사실 혹떼려도 혹 하나 더 붙이 할아버지처럼 되기 싫다는 말은 혹떼고 부자 된 할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도깨비 방망이입니다.

요즘 이 나라 저 나라 할 것 없이 도깨비 방망이를 남발하고 있지요.

물론 혹떼려도 혹 더 붙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도깨비 방망이를 진짜 구한 사람들이 있지요.

복권 말입니다.

복권도 얼마나 많은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린 또 부러움의 대상이 생깁니다.

무엇입니까?

도깨비 방망이, 그렇지요.

언약궤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언약궤 아닙니까?

요단강이 범람하는 시기라고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흐르던 요단강물이 그쳤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인간은 그 때 마침 다른 곳에 제방이 터져서 요단강물이 그쳤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자고 하는 자들이지요.

이들은 성경을 처음부터 자신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겠다는 말입니다.

아니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말씀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언약궤를 앞장세웠는데 왜 요단강물이 그치는가는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언약궤와 거리를 이천보쯤 떨어져야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출애굽기 14장에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 그것을 갈라지게 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11,12절을 봅시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뒤쪽에는 바로의 군대가 자신들을 죽이려고 쫓아옵니다.

앞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원망 속에서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13,14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오늘본문과 뭔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천보쯤 떨어져 행하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이천보면 1.8킬로미터 정도 되나요.

언약궤와 분리를 시켜버립니다.

언약궤가 언약의 말씀을 이룬다는 말이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언약궤, 즉 죄용 서함의 은혜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언약궤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언약궤를 다른 말로 하면 증거궤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궤란 말입니까?

증거궤 속에 증거판이 들어갑니다.

두 번째 돌판입니다. 출애굽기25장16절에 나옵니다. 또 하나는 만나요 (출16:34) 또 하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민17장).

이것들이 도대체 무엇을 증거합니까?

이스라엘의 죄를 증거합니다.

증거판, 증거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궤가 됩니다.

죄를 증거하는데 그 위에 피가 발리어지기 때문에 그 죄가 사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죄악의 증거가 항상 은혜가 내리는 시은좌와 붙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용서 되었다. 그러니 이제 너희들 죄 없다가 아닙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항상 죄인이다.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내가 피로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

나의 긍휼이 너희를 구원한다는 것을 항상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언약궤를 매고 앞장서 나간다는 말은 우린 죄인입니다. 죄인의 증거가 그 언약궤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언약궤를 앞장세우는 모습이지요.

다르게 표현하겠습니다. 그러한 믿음이라고 하면 또 인간 주체가 튀어 나오지요.

그래서 이천보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 요단을 건너게 하는가?

너희들은 뻔하다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요단강가까이보면 먼저 뭐라고 말할지 다 알 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원망했듯이 동일하게 여호수아를 원망할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멀려 떨어뜨려 놓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죄인으로 규정해 버리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더라도 별 소용없습니다.

단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요. 그래 봐야 원망입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요단강을 멈추게 했습니다.

13절을 보면 요단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물이 쌓여 선답니다.

출애굽기14장29절을 보면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물이 그친 것이 아니라 물이 쌓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을 마른땅으로 건넙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언약궤가 있으면 좋겠지요.

제가 서론에서 말씀드렸지요.

이런 언약궤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언약궤가 있다고 생각해요.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십자가입니까?

예수님이 되었던지 십자가가 되었든지 이들에겐 도깨비 방망이입니다.

사도행전8장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도 받았습니다.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을 목격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사도들이 안수하니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이 돈을 드리면서 말합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조수서 하니.

참으로 놀라운 발상 아닙니까?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돈으로 이 권능을 살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너무 천박하게 말했지요.

헌금을 엄청나게 많이 합니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이러한 능력을 주옵소서.

돈 아까운 인간들은 시간으로 때우지요.

기도 오래합니다.

눈물도 많이 흘립니다. 정말 간절하게 부르짖습니다.

저에게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바닥도 치고 난리난리를 피웁니다.

시몬이란 어찌 그리 똑같습니까?

성령을 받아 본적이 없다보니 부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신을 드러내는 무엇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약궤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들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언약궤같은것 있으면 정말좋겠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언약궤가 앞장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희들 죄인이야. 너희들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너희들은 죄인이야. 그 증거가 여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언약궤 앞장세우고 가는 자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기분이 너무 나쁩니다.

언약궤를 제대로 안다면 그렇지 않습니까?

요한복음6장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합니다.

이유는 다 아시지요.

얼마나 좋습니까?

이 땅에서 편안히 놀고먹으며 천국 생활하니 말입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때가 되면 알아서 밥 주시고, 구하지 않아도 돈 주시고,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다 처리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지요.

그래서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시몬처럼 돈 갖다 바칩니다.

이렇게 해도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예수님 아닙니다.

예수님 속에는 우리의 죄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도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예수님이 전파되고 예수님이 전해진다는 것은 언약궤를 앞장세우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예수님을 전한다고 하면서 왜 자신이 죄인인지 모를까요?

왜 자신이 부인되어야 하는지 모를까요?

예수님을 믿고 난 후니 더더욱 자신이 생깁니까?

이런 사람은 믿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슬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과 싸울 때 패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언약궤를 갖고 오자고 합니다.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블레셋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졌습니다. 오히려 조롱만 당했지요.

뿐만 아니라 언약궤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들은 언약궤를 무엇으로 생각했습니까?

도깨비방망이로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인간들 손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야 자기들 뜻대로 마음대로 십자가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십자가 그러한 예수님은 모두가 우상입니다.

인간의 바램, 꿈을 이루어주는 예수님은 우상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도 우상입니다.

이런 예수님, 이런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겐 주님의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천보 떨어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합니다.

자신은 죄인임을 이천보 떨어져 인정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니 성도는 무엇을 전하는 자가 될까요?

자신은 죄인중의 괴수임을 끊임없이 밝히고 인정하면서 예수님의 피만이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셨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 한셑트가 언약궤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죄인인 성도가 한셑트가 되어 움직입니다.

어디를 가도 예수님의 피만이 전파될 수밖에 없도록 움직입니다.

성도가 이런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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