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지파에게 나누어지는 기업
여호수아13장8-14
여호수아13장에서 19장까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땅을 분배하는 내용입니다.
13장은 요단 동편 땅입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절반 지파에게 기업을 나누어 줍니다.
14장에서 19장까지는 요단동편 땅을 유다, 에브라임, 므낫세 반지파, 베냐민,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단 지파에게 기업을 나누어 줍니다. 여기에 레위지파도 들어갑니다. 물론 이들의 기업은 따로 있습니다.
지파수를 세어보면 모두 13지파가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파는 모두 12지파이지요.
그렇습니다.
창세기49장에 보면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불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을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지파가 십삼 지파가 되지요.
왜 그럴까요?
성경에 익숙하신 분들은 금방 알아 차렸을 것입니다.
요셉지파를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나셋으로 나누어져 있지요.
이들은 특별히 야곱의 축복을 받은 손자들입니다.
창세기48장에 나옵니다.
요셉이 하나님에 자신에게 주신 아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들에게 축복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당연히 야곱의 우수로 장자 므낫세에게, 좌수로는 차자 에브라임에게 얹어 축복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자권이 당연히 므낫세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왼손 쪽으로 에브라임을, 오른손 쪽으로 므낫세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갑자기 바꿔치기를 해 버립니다.
팔을 어긋맞게 얹었습니다.
오른손을 에브라임 머리에, 왼손을 므낫세 머리에 얹고 축복을 했습니다.
참 희한하지요.
우리들 생각엔 요셉이 오히려 이런 식으로 생각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간단하잖아요.
열두 형제 중 누가 장자 노릇했습니까?
누가 다른 형제들을 살렸습니까?
요셉이잖아요. 그러니 요셉생각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거기까지 였습니다.
요셉이 해야 하는 역할이 따로 있었던 것이지요.
야곱을 통해 다시 요셉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가 요셉이야기로 끝날 것 같았지만 야곱 손안에서 축복과 저주가 결론 나고 있습니다.
요셉이든 야곱이든 모두가 다 십자가를 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 속에서 십자가만을 전하는 사건들을 계속해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요셉도 예외가 아니지요.
적어도 자신의 자식들은 야곱과 에서와 달리 정상적으로 장자권이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셉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두말할 이유 없이 므낫세가 장자고 에브라임이 차자이기 때문입니다.
육적으로 보니 신앙적으로 보나.
그러나 야곱은 다르지요.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 말입니다.
요셉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창세기49장에서는 분명 12지파였는데 왜 여기에서는 13지파로 나옵니까?
이유를 아셨지요.
요셉이 두 배의 분깃을 받은 것입니다.
창세기49장24절을 보면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고 축복받았습니다.
그런데 시편78편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
야곱이 축복한 대로 힘을 가졌지만 전쟁의 날에 물러가버렸습니다.
결국 시편78편67절에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이렇게 보면 야곱의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한 축복이 그냥 축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장자권에 대한 축복입니다.
야곱의 장자권, 즉 하나님이 축복을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에게 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보아도 요셉이 야곱의 장자역할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르우벤은 장자역할을 못했지요.
그런데 창세기49장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8-10절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두 개를 깔아 놓았습니다.
요셉에게서 목자가 나온다는 것이고 왕의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축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깨어 버립니다.
요셉의 장자 므낫세를 깨어 버리고, 다시 에브라임조차 깨어 버리고 유다지파에게서 왕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서를 깨어 버리고 야곱을, 야곱을 깨어 버리고 요셉을, 요셉을 깨어 버리고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을 깨어 버리는 , 사람들이 예상하고, 당연하리라는 것을 다 깨어 버립니다.
물론 여기에 인간의 죄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따로 기업을 얻은 것은 야곱의 축복에 근거한 것입니다.
창세기 48장22절에 나옵니다.
"내가 네게 네 형제 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이 말씀도 참으로 재미 있는 말씀이지요.
누가 뺏었다고 합니까?
야곱이 뺏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 뺏었습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함께 힘을 합쳐 빼앗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분배받은 기업은 자신들의 힘으로 뺏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은혜라고 해야 하지요. 물론 그 바탕에 자신들의 광야생활을 깔아 놓아야지요.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따로 기업을 받은 것은 목자에 대한 말씀, 장자권에 대한 말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78편에 나왔듯이 이들은 역시 장자권이 박탈됩니다. 전쟁의 날에 병기를 갖추고 활을 가졌지만 물러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버리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유다지파의 기업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기업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48장으로 가면 다시 열두 지파가 나옵니다.
한번 볼까요?
단(1), 아셀(3), 납달리(4), 므낫세(4), 에브라임(6), 르우벤(6), 유다(8),베냐민(24),시므온(25),잇사갈(25), 스불론(27), 갓(28) 지파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누구 지파가 빠졌습니까?
레위 지파가 빠져버렸지요.
요셉을 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집어넣은 이유가 다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레위지파의 분깃은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라고 나옵니다.
에스겔에서도 그렇지요. 제사장들이 받는 기업은 따로 있지요.
그런데 제사장들 즉 사독의 자손 중 거룩히 구별한 제사장들이 레위 지파를 대신해 버립니다.
에스겔48장11절에 보면 레위사람의 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시편78편에 나오는 요셉의 장막을 싫어하시며 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독의 자손 제사장 중심으로 기업이 주어집니다. 물론 레위지파는 여전히 있습니다.
에브라임지파도 여전히 있고요.
이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흔적을 그대로 남겨 둡니다.
그리고 문들은 여전히 원래대로 이름이 붙어집니다.
성읍의 북문은 르우벤, 유다, 레위, 동편은 요셉, 베냐민, 단, 남편은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서편은 갓, 앗셀, 납달리 문입니다.
이렇게 이름이 들어갔다가 빠지고 들어갔다가 빠지고 들어가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 성읍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고 합니다.
여호와 삼마의 뜻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여호와께서 계실만한 유일한 곳, 이것이 이 성읍의 이름입니다.
여호와께서 계실만한 유일한 성읍의 성격이 희한하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21장에 가면 에스겔48장에 대한 말씀이 새롭게 말씀되어지고 있습니다.
12,13절입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문, 북편에 세문, 남편에 세문, 서편에 세문이니"
그런데 열두 지파의 이름이 나오질 않습니다.
오히려 열두 기초석이 나오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등장합니다.
인물이 등장합니다. 십이 사도.
이들은 어린양의 십이 사도라고 지칭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린양의 십이 사도니 어린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물론 이것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지요.
열두 사도들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줄 메시아로 대우했지요.
결국 예수님을 팔아먹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자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뭐 안 잊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마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는 철저하게 죽임당한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자신들이 죽였던 어린양이었고,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어린양입니다.
그 어린양의 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어린양의 피로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린양의 열두 사도로, 죽임당한 어린양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어린양이 가신 그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문들이 어린양의 피로 범벅되어 있으니 그 안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에스겔이 본 성읍,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참된 땅을 보여주는 실물교육이었습니다.
참된 땅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갑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씻음을 받은 자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만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바뀌어 버렸지요.
우리들은 자꾸 땅에 관심이 가지요. 장소에 관심이 가지요.
그런데 성경은 어린양의 피로 뒤덮인 땅에 관심을 둡니다.
땅의 언어로 천국을 끝까지 묘사해 줍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또 다른 천국을 꿈꾸지요.
계시록에 나오는 천국.
가보고 싶잖아요.
우리 어릴 때 부흥사들로부터 이런 이야기 많이 들었잖아요.
우리가 마음에 갖고 있는 천국 상을 요한계시록을 인용해서 마구 설명해 주잖아요.
그래서 천국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우린 기도 하잫아요.
주님 천국처럼 살게 해 주세요.
건강하고, 자식 잘되고,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사업 잘되고. 무병장수하도록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내가 가는 곳 마다 사랑이 넘치게 해 주시고.
내가 가는 곳 마다 화목하게 해 주시고,
싸움이 없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이런 천국 꿈꾸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천국은 어린양의 피만 가득한 천국입니다.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흐릅니다.
어린양이 여전히 주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천국은 영원히 어린양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다는 사실은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산다는 자체가 어린양의 피공로로 산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천국백성입니다.
천국이 성도의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던 저렇게 표현하든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은 어린양의 피, 즉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물론 자신은 천국 올 자격 없음을 아는 자이지요. 죄인중의 괴수라는 말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땅이 주어지는 순간 우린 죄인으로 발각됩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성도에게 임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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