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 강해 18

푸른 섬 2011. 10. 16. 15:08

기업 없는 레위지파

여호수아13장14

우리들이 읽은 본문에 의하면 레위지파는 기업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14장4절에서는 레위인들이 거할 성읍과 가축과 재물을 둘 들은 있습니다.

참 재미 있지요?

재산과 가축은 없습니다. 이유는 기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농사지을 땅, 가축을 먹일 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축과 재물을 둘 빈 들은 받았습니다.

만일 다른 지파들이 화목제를 드리지 않게 되거나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되는 일이 발생하면 먹고 살 일이 막막해 집니다.

뭐라고 할까요?

정말 믿음으로만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레위지파의 기업 없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이야 대단하다. 정말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구나?

아니면 저 레위지파가 어떻게 살아갈까?

정말 걱정된다 이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혹은 나머지 지파들이 레위지파를 먹여 살리려면 고생하겠다 생각했습니까?

레위지파가 왕도 아닌데 왜 나머지 지파들이 고생해가면서 저들을 먹여 살려야 할까요?

레위지파는 제사 드리는 일과 관련된 일을 합니다.

우리들 생각에 제사 드리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한가 생각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양을 잡고 소를 잡아 피를 흘리고 뿌리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요?

우리야 당연히 중요하다고 배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사 드린다고 밥이 나옵니까?

레위지파에겐 밥이 나옵니다.

이것이 이들에겐 생업이 아니지요. 그야 말로 은혜로 사는 자들이지요.

레위지파에겐 밥이 되고 돈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지파가 보기엔 어떨까요?

과연 저들이 하는 일이 자신들의 생업에 영향을 주느냐 말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사실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레위지파는 오히려 나머지 지파에겐 귀찮은 존재가 아닐까요?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지요.

차라리 레위지파가 없었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냥 너희들끼리 알아서 제사 드려라. 그것을 너희들 끼리 먹고, 십일조 할 필요 없다.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니 너희들 마음대로 사용하고 살아라. 이렇게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자신들이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뼈 빠지게 농사짓고 가축 길러 만날 먹고 노는 자들 같은 레위인들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여기서 레위지파 입장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일 우리가 레위지파라면 오늘 본문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먼저 찾아오는 것이 무엇일까요?

불안감 아닐까요?

지금이야 막 가나안땅 정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다른 지파가 들을 것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습니까?

과거 경험들을 이들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이렇게 편안하게 읽고 있지만 듣는 레위지파는 참으로 불안합니다.

성읍은 있어요. 양우리 소우리도 있어요.

문제는 현찰이 없어요. 소가 없어요. 양이 없어요. 빈 우리만 있어요.

마냥 기다려야만 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다른 지파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제가 레위지파들을 너무 속물로 봅니까?

아닙니다.

레위지파라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레위지파들도 속물이지요.

이 속물 건성이 앞으로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사사기 17장을 보면 방금 제가 이야기 드린 그 예가 나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2절입니다.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 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 엄마가 돈 훔쳐 간 자를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를 아들 미가가 들었습니다.

아들 미가가 그 돈을 자신이 취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엄마가 저주를 무엇으로 바꾸려고 합니까?

복으로 바꾸려고 하지요.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3절을 봅시다.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은 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말이 어렵지요.

4절을 보면 쉽습니다.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간단하지요.

여호와께 은 일천이백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드림이 어떻게 드려 졌습니까?

은 이백은 신상을 부어 만드는데 사용했습니다.

신상을 만들었지요. 그렇다면 나머지 일천은 어디 갔습니까?

아들미가에게 주었지요.

이게 여호와께 드린 내용입니다.

이해했지요.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곧 자기 아들을 위해 신상을 만들고 남은 돈은 모두가 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또한 미가에게 신당이 있습니다.

개인 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절이라고 표현해서 이상합니까? 신상도 있지 않습니까?

또한 이곳에 에봇과 드라빔도 있습니다. 미가가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28장에 보면 대제사장이 입는 옷이지요. 그런데 미가가 개인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을까요?

복입니다. 복 받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또한 드라빔도 만들었습니다.

드라빔은 점을 칠 때 쓰던 집안의 수호신상입니다. 야곱의 삼촌 라반이 갖고 있었고 야곱의 아내 라헬이 그것을 훔쳐 왔던 것이지요.

미가 집에 여러 가지가 있지요.

꼭 우리들 마음 같아요.

뿐만 아닙니다.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미가가 레위지파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요.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베들레헴에서 올라온 레위소년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제사장은 누가 담당합니까? 레위지파지요.

미가는 알긴 알아요. 복이 어떻게 오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봅니다.

에봇도 만들고 드라빔도 만들고 신상도 만들고 아들로 제사장을 세우고, 더 확실하게 복을 받기 위해 레위지파에 속한 소년을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것도 미가가 레위소년을 거룩히 구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13절입니다.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복에 미친 것이지요.

복 받는데 미친 사람이 미가입니다. 꼭 여기 있는 우리 같지 않습니까?

10,11절을 보세요.

한번 읽어 봅시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하기를 만족히 여겼으니 이는 그 소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레위인들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화목제물 아니면 십일조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제사장일이 직업이 되었습니다.

평생직장을 구한 것이지요.

제대로 대우 받는 교회로 들어간 것입니다.

제대로 대우 받는 교회로 들어가서 복을 빌어 줍니다.

제사장이니 에봇을 입고 제사를 드렸겠지요.

그래서 열심히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행동이 단지파로 옮겨갑니다.

단 지파는 아직 거할 기업을 구하는 중이었습니다.

용맹 있는 다섯 사람으로 정탐을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미가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 레위인 소년을 만나게 되고 소년으로부터 이곳에 고용되어 제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들 정탐꾼들이 이 제사장에게 묻습니다. 형통할까요 형통하지 않을까요?

제사장이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제사장 정도 되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편안한 말, 듣고 싶은 말을 해 줍니까?

이런 소리 듣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것 아닙니까?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는데 평안하게 이룰 것이요 여호와 앞에서 행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 얼마나 기분 좋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니 이들 정탐꾼들에게 제사장이 마음에 들까요 들지 않을까요?

마음이 쏙 들었습니다.

실제로 라이스에 이르러 보니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은 딴 곳에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사장을 미가 집에서 뺏었습니다.

새긴 신상, 에봇, 드리빔, 부어 만든 신상 모두를 취합니다.

그리고는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손을 네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삿18장19

여러분이 제사장이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 드라빔, 새긴 우상을 취하여 단 지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집안의 제사장 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면 대우가 훨씬 좋겠지요.

한 가장 모이는 교회 목사보다 100가정 모이는 교회 목사가 더 나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우가 다르지요.

얼마나 기분 좋겠습니까? 한 가정 목회하다가 100가정, 1000가정이 모이는 교회에서 청빙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얼씨구나 하고 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미가 엄마, 미가, 그리고 단의 5명 정탐꾼, 단 지파.

이들의 본 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복입니다.

이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부차적입니다. 말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은 언제나 자신들이 복 받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레위지파에게 기업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한 부잣집의 제사장이 됩니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됩니다.

돈벌이가 되면 무슨 짓이든 하지요.

오늘날 목사들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목사들을 욕하겠지요.

목사들 같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도 다 똑 같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19장을 보면 예수님께 부자청년이 찾아온 내용이 나옵니다.

이 부자청년이 왜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우리들이 보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율법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물을 정도로 부자입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자신이 이미 갖고 있습니다.

마치 미가나 단 지파처럼 말입니다.

그 답변에 예수님께서 맞장구만 쳐 주시면 되는 것이지요.

이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 아닙니까?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내 속에 있는 답에 맞장구 쳐 주시기를 원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맞장구를 쳐 주시지 않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1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찾는 이유는 가지가지입니다.

자식 낳게 해 달라. 건강하게 해 달라. 부자 되게 해 달라. 평안하게 살게 해 달라. 공부 잘하게 해 달라. 사업 잘 되게 해 달라. 걱정 없이 살게 해 달라. 행복하게 살 게 해 달라. 천국 넣어 달라 등등.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답변하실까요?

십자가를 내 미십니다.

그게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생각이 지옥갈 자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지파에게 기업이 없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들이 죄 아래 있음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인간들은 자기 복 밖에 모르는 인간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이겁니다.

고린도 전서9장에 보면 오늘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7절-18절입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그리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 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으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으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이 말씀이 오늘 본문과 똑 같지 않습니까?

복음 전하는 자와 복음 전함을 받는 자의 관계

그런데 이 본문이 사사기에서 일어난 일과 똑 같은 일을 발생시킵니다.

목사는 돈에 미쳐 버리고 성도도 돈에 미쳐 버리는 일 말입니다.

복에 미쳐 있는데 이 본문이 온전히 보일까요?

고린도 교인들은 여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그래 너 끝까지 그 권을 쓰지 말라고 할 자들이 있겠지요.

또한 어떤 목사는 이 말씀을 갖고 사례 내어 놓아라고 하겠지요.

또한 어떤 목사나 교인은 그래 헌금해서 목사, 복음 전도자를 먹여 살려야지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사도로서 당연히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어디로 끌려 갑니까?

십자가로 가버립니다. 값없이 복음 전하고 자신에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않는 것이 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 당연한 권리. 권리가 있다면 상대 쪽에서는 의무가 있겠지요.

이런 말씀 앞에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의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말씀대로 의무를 행사하는 것은 의가 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피로 자신이 구원을 거저 받은 것, 복음 전파자로 부름 받음 자체가 상임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이 복을 모르는 자는 오늘도 외칩니다. 나는 사례 받을 권리 있어요. 나는 헌금할 의무 있어요. 오늘도 내 권리, 내 의무 다했어요 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노리는 것은 복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돈입니다. 오늘날 이런 자들로 교회가 가득차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듣는 자체가 복 받은 자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오늘도 예수님을 쉴 새 없이 찾아 와서 구하고 또 구합니다. 복주세요. 돈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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