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
여호수아20장1-9
출애굽기20장13절을 보면 “살인하지 말지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어떤 경우라도 살인하지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어떤 조건 하에서는 살인해도 될까요?
그야 간단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모른다면 당연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당연히 어떤 상황에서라도 살인해서는 안된다라고 말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살인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어느 나라치고 살인하는 자를 두고 잘했다고 하는 나라 있습니까?
없지요. 잡아 감옥이 집어넣든지 아니면 사형에 처하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중요시 여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를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사회 조직입장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살인하라는 말씀이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 처음 들어 보았습니까?
우리들이 요즘 보고 있는 여호수아서를 보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입니다.
그것도 진멸합니다. 누가 앞장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장서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을 행하지요.
이렇게 되면 십계명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을 달리 해석해야 합니다.
무조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십계명은 누구에게 주십니까?
애굽 땅 종 되었던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을 먼저 이해하려면 자신이 종 되었던 자였고 구원받은 자임을 인정해야 되겠지요.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은 죽어야 하는 자였는데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타인들, 즉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어야 하는 자는데 유월절 어린양이 대신 죽음으로 그 피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누구로 인해 사는 자들입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인해 사는 자들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는 피로 사는 자들입니다. 즉 각자의 인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다 살려주시는 분에 의해 살림 받아 사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백성들 가운데 타인은 단순한 인간적인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이 아닙니다.
영생과 상관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새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생명은 이들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사신바 된 생명이지요. 그러니 이들을 죽인다는 것은 누구를 죽이는 것이 됩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방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들은 그냥 육입니다.
그냥 죽어도 살아도 별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 이들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못 가져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시지요?
잘 모르십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 취급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7장26절 이하를 보면 헬라인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다 부모이니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시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간구합니다.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해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시니 당연히 이 여인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해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개니 나의 긍휼을,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씀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상당히 우리들을 실망시키지 않습니까?
당연히 사랑으로 이 여인의 간구를 들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딸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타 들어가는데 개 같은 여인이니 당신에겐 사랑을 베풀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하기에 우리들은 또한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여인이 딸을 위해서라면 무슨 모욕이라도 감당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황이 그런 정황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고 싶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뭐라고 하시는고 하면 너희들은 개같은 자들이니 구원받을 자격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사실 우리들이 그렇지요. 우린 개와 돼지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겐 구원이란 없습니다. 애당초 해당사항이 없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욧.
바로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이들에게만 해당됩니다.
십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도 이들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을 죽이는 것은 그냥 개 돼지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 상당히 기분 나쁘지요.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상관없는 자의 죽음은 그야 말로 개죽음입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귀하고 소중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소중함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살인하지 말지니라를 이해하고 난 뒤에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본문의 주 내용은 도피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도피성이 무엇인고 하면 사람이 의도적이 아닌 살인을 했을 때 도망쳐 피하여 숨는 성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누가 가장 분노하겠습니까?
가족들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친한 친구.
그래서 살인사건이 나면 자신이 사랑하는, 아끼는 사람을 죽인 사람을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도피성을 이스라엘 곳곳에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그 성읍들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고를 고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받아 성읍에 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하게 하고 피의 보수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어 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 이웃을 죽였음이라”
그렇다면 이 사람이 고의로 죽였다 죽이지 않았다는 어떻게 분별합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재판을 받는 방법입니다.
그 상황에 대해 설명하여 재판을 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이 고의로 죽이지 않았음을 판결 받으면 됩니다.
또 한 가지는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는 방법입니다.
방법이 참으로 희한하지요.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들어가서 나오지만 않으면 그냥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다시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 죽임 당한 자의 가족이라면 이런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얼마나 불합리한 말씀으로 여기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사로이 살인할 수도 없고 , 자신이 사랑하는 자가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하더라도 함부로 원수를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원수를 타인이 만들 수도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만드신다는 사실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도피성을 두셨을까요?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실수로 사람을 죽일 경우 그 사람이 실수로 죽였으니 그 사람은 살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의도하지 않게 사람을 죽였을 때 그 죽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도피성의 의미는 어떻게 됩니까?
도피성이 이스라엘 가운데 여섯 개가 늘 있다는 것은 너희들은 언제든지 죽어야 하는 자들임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도피성이 부지중 살해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은 그런 용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특히 대제사장의 죽음과 살해자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너희들이 지금 살아가는 것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21-26절을 보겠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형제란 하나님께 속한 자를 말합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이미 제대로 설명 되어 졌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예수님 당시로 들어가 보면 누가 형제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2장11절을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속한 분, 예수님에 대해서 과연 형제로 대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와 동일하게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미워하는 것과 살인은 차이가 상당히 많지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없나요. 잠시 미움이 생길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람을 미워하는 것과 살인을 같이 봅니까?
그런데 예수님에 관해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인간들은 이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이야. 그러나 예수님을 미워하진 않아. 예수님을 죽이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 자체가 곧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구약 율법, 즉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되어 성취되는 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힘을 합쳐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들이 지옥 불에 가야 하는 그 타당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 불에 들어가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개나 돼지 같은 자입니다.
아이들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들이,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할머니든 , 누구든 다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구원시킨 자들이 생겼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지옥가야 마땅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인간들의 힘과 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죽음으로 가신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여기에 이용되었습니다.
이용되면서 모두가 다 지옥가야 하는 자들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압니다.
도피성을 생각해 봅시다.
도피성은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바로 부지중 살해한 자들을 위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살해된 자는 누가 죽였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지중 살해한 자는 죄가 없나요? 물론 죄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죄가 있다 없다는 논하는 것은 말씀이 하시고자 하는 의미를 퇴색시킵니다.
부지중 살해자가 머무는 도피성과 그 운영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예수님,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죽인 자입니다. 의도적인든 의도적이 아니든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런 자를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십니다.
성도는 이미 도피성 안에 사는 자들입니다.
심판받아 죽어야 하는 자들이지만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자로,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고 천국 백성으로 사는 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알아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임을 알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밖에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나 도피성에 머무는 자가 아닌 자들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합니다. 나는 의도적으로든 의도적이지 않던 예수님을 죽일 마음도 없고 예수님을 죽이지도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아니면 과거에 그랬는지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도피성에 피한 자가 아닙니다. 도피성에 피한 자가 대제사장이 죽거나 아니면 판결 받아 무죄임을 입증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요. 그렇게 되면 고향사람들이 이 사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심판이 우리가운데 늘 함께 있구나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린 죽은 자, 지옥 불에 가야 할 자임을 고백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