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여호수아22장1-6
고린도 후서4장을 봅시다.
1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긍휼하심은 우리들이 늘 듣는 단어라 별로 생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낙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물론 낙심하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낙심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도바울이 왜 낙심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했을까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 직분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도는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쉽지요. 또한 별로 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그릇에 보배가 담겼습니다.
그러면 질그릇이 금그릇으로 바뀝니까? 아니면 다이아몬드 그릇으로 바뀝니까?
안 바뀝니다.
질그릇은 질그릇 그대로 있습니다. 변신하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우겨쌈도 당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이건 어디가도 얻어터지는 일밖에 없습니다.
동네북입니다. 보배를 가졌다면 보배를 가진 자로서 오히려 타인보도 우위에 서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답답한 일을 만날 이유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핍박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는 자들을 굴복시켜 그들로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섬기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탈출 불가입니다. 오히려 10,1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사망이 이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일행이 가는 곳마다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흔적이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죽음이라 하니 우리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별로 와 닿지 않지요.
다르게 표현해 볼게요. 실패 말입니다.
실패자로 낙인찍혀 살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목사들이 만나면 그런 이야기 합니다.
너 어디서 목회하느냐? 교인은 몇 명이냐?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이것을 다르게 질문하면 이렇습니다.
이번에 수능시험을 치렀지요.
수능 잘 쳤니? 그러면 좋은 대학 가겠지? 어느 대학. 서울대학. 아니면 어느 대학.
사업이 잘 되니? 이런 질문입니다. 우리들이 친구들을 만나면 궁금하나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느냐 아닙니까?
너 십자가 아니? 이런 질문 하지 않잖아요.
자식 잘 커고 있니? 사업을 잘 되고 있지? 이런 질문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바울 일행이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요. 방금 보았듯이 우리는 늘 사망의 흔적, 죽음의 흔적을 남기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낙심이라는 단어가 늘 따라 붙어요.
인간은 죽음을 근본적으로 싫어합니다. 어느 누가 죽음을 좋아하겠습니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기를 바라지 어느 누가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여러분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로부터 미움 받고 따돌림 받으면 기분 좋겠습니까?
기분 아주 나쁘지요?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러분도 친구들을 만나거나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여러분들을 인정해주고 추켜 세워주면 기분 좋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여러분들을 똥보듯이 냄새난다 저리 가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성도가 이런 취급 받습니다.
참 이상한 일 아닙니까?
보배를 가졌는데 어떻게 이런 취급 받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도는 이런 취급을 받을 때 어떤 생각을 갖느냐는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낙심도 없고 당당할 것 같지요? 그래 난 우겨쌈도 없고, 답답한 일도 없다라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보바울도 그랬습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성령 받았으면 거꾸러뜨림 당할 일 없고, 답답한 일 당할 일 없고, 우겨쌈을 당할 일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어요.
감옥에 갇혀서 그래 그래 기분 좋다 할 사람 있겠습니까?
매를 맞으면서 그래그래 하나도 아프지 않다할 사람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라고 아프지 않았을까요?
여전히 질그릇입니다.
성령 받았다고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낙심하지요. 낙심이 없다가 아닙니다.
낙심이 없다면 낙심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왜 하겠습니까?
낙심, 답답함, 죽음 이런 것들이 늘 따라 다닙니다.
만일 이런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신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고 완벽한 사람인데 십자가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성령 받았다고 해서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완전함은 없습니다.
오히려 질그릇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그런 가운데 이들은 입만 살아 있어요. 겉 모습은 후패합니다. 겉모습 보고 어느 누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아요. 겉모습은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본받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싫어요. 멀리하고 싶어요. 죽음의 흔적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죽음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입만 살아서 십자가의 피만 전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담대히 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하는데 자신들이 살아가는 꼴은 완전히 종의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타인에게 설득이 되고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해 될 수 없어요.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그래도 사도 바울이 능력을 행하지 않았느냐? 감옥 문에 열렸을 때 도망하지도 않았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래요. 그런 사실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 때문에 간수가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런데 그 간수 그 후로 어떻게 살았을까요?
죽음의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공부하면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본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또 다시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님 때문이지요. 예수님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다시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12장10,11절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더라”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은 오히려 죽음의 흔적을 흘리면서 다닙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마귀의 자식입니다.
마귀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자입니다. 물론 한통속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 마귀가 와서 시험할 때 돌로 떡덩이를 만들어라. 뛰어 내리라. 세상 권세를 주겠다는 이야기를 누가 좋아합니까?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이 좋아하잖아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들 모두가 다 좋아하잖아요. 이것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해 보세요.
없습니다. 돈 좋아하지 않는 사람 없어요. 능력 좋아하지 않는 사람 없어요. 세상 권세 좋아하지 않는 사람 없어요.
난 아닌데요 하는 사람 있어요.
이런 사람은 자신을 몰라요. 자신이 마귀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난 예수님을 믿어서 그렇지 않아요 하는 사람 있나요?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왜 성도는 이렇게 죽음의 흔적을 남기고 살아야 하는 가입니다.
고린도 후서4장11절입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참으로 희한한 논리 아닙니까?
성도는 산자입니다. 그런데 항상 예수님을 위해 죽음에 넘기움을 당해야 합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어떻게 자신들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이들이 전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주되심.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했기에 산자가 죽음에 넘기움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곧 죽을 육체 가운데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난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산자라고 했을 때 새 생명을 얻은 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영생을 받은 자가 죽음에 넘기 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반복하고 있지요.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산 떡입니다. 영생입니다. 진리입니다. 생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주님이심을 전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넘기웠습니다.
이 모습을 성도가운데 그대로 반복됩니다. 십자가 사건이 여전히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듯이 성도도 그러합니다.
12절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성도는 예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은 예수님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예수님과 다른 점은 자신은 여전히 질그릇으로 남아 있으면서 예수님의 삶, 즉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일어나지요.
고린도후서4장16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물론 이렇게 자신 만만하게 성도가 고백하지만 사도바울이 16장8절을 보면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빌립보서1장 23절을 보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사도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전적으로 보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이유는 빌립보서1장20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쓰시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주께서 알아서 주님만 존귀케 되기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있을 욕망이 더욱 좋다는 말은 이 땅이 좋다는 말입니까 싫다는 말입니까?
싫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어떻게 사용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살려 주십니다.
빌립보서1장29-30절을 봅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사람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은혜로 끝나버리면 좋은데 고난이 함께 옵니다. 그러니 얼마나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에서와 같이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입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 사건의 반복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절대로 개인적인 구원이나, 평안함, 욕망을 위해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이 어떤 삶인가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는 삶. 왜 고난이 따릅니까?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 피만을 전하니 고난이 따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사람의 지혜나 경험, 지위, 어떤 것도 죄라고 합니다.
사람 자체가 죄인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도 죄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만이 의롭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기분 나빠합니다. 당연히 기분 나쁘지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라고 하니 기분 나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죄라고 하니 얼마나 짜증나겠습니까?
헌금하는 것도 죄요. 기도하는 것도 죄라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할까요? 핍박을 가합니다. 누구를. 예수님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믿는데 왜 고난이 오느냐고 하시겠지만 그 믿음의 내용 때문에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도 자신의 삶이 없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이미 안식을 얻었지만 형제들의 안식을 위해 최선봉에서 전쟁을 합니다.
죽음도 불사하지요.
물론 외견상으로는 형제들의 안식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형제들의 안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자신의 주되심을 위해 자기 백성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합니다.
물론 일부분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다 틀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구원받는 자를 위해 있는 분입니다. 소모품이지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단지 형제들의 안식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성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냥 안식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것이 이들의 존재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주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것을 위해 일해 오셨고 모든 만물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성도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성도가 질그릇으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하면 고난을 받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나 구원받았으니 끝났다. 나 안식 얻었으니 끝났다는 식의 사고는 성도에게 없습니다. 이런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님의 주되심만 전하다가 얻어터지고,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함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런 사람과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들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멀리하고 싶은 사람들이지요.
'여호수아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수아강해 23 (0) | 2011.11.22 |
---|---|
여호수아강해 21 (0) | 2011.11.14 |
여호수아 강해 20 (0) | 2011.10.30 |
여호수아강해 19 (0) | 2011.10.23 |
여호수아 강해 18 (0) | 2011.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