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강해 21

푸른 섬 2011. 11. 14. 20:56

자기의 기업에서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여호수아21장1-3

창세기1장을 읽어 보면 사람이란 제 육일 가장 마지막에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이 창조 되었을 때 세상은 이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람 즉 아담은 자신이 만들어 지고 싶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복을 주셨습니다.

어디를 보더라도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권리를 행세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거져 받았을 뿐입니다.

아담 존재 자체가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자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어떻게 바뀝니까?

자기 소유가 생깁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남편을 자기 소유로 바꾸어 버립니다.

남편은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는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알아서 행동합니다.

자신들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무닢을 엮어 치마를 했습니다.

거져 받은 세계를 살다가 더 이상 거져 받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단도리 할 것이 생겼습니다.

그냥 살면 되는데 이제는 그냥 살수 없는 장이 펼쳐집니다.

숨고 핑계대고. 선악과를 먹기전과 후의 차이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숨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해 원망할 일도 없겠지요.

이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가 그 실과를 내게 주었기 때문에 내가 먹었다고 말합니다.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다고 하지요. 사실 여자나 뱀이나 모두가 하나님께서 거져 주신 은혜의 산물입니다.

창세기1장을 읽어 보면 뱀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셨지요?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은 원인, 최종 원인 제공자를 하나님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감사로 살아가는 장에서 이제는 너 때문이야라는 원망으로 살아가는 장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너란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도 만들어 놓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드셨으면 그냥 먹게 하시지 왜 금지하셨느냐 말입니다.

처음부터 만들지 않으셨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첫째 아담안에 있는 자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주셔서 그 다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인간들이 저주아래 놓여지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담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저주 아래 놓여져야 비로소 생명나무가 어떤 것인지 그 의미가 밝혀지게 됩니다. 선악과도 그렇지요.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그 열매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몰라요.

그런데 먹어 보니 모든 인간들을 저주 아래 놓이게 하는 열매였다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나무는 인간들에게 가리워집니다.

그룹들과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기를 차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생명나무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여자의 후손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생명나무는 곧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임을 알려 주셨지요.

세상은 저주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 속에서 생명나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 이상한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지파에겐 기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할 곳과 가축들을 가둘 우리는 주신다고 하셨지요.

문제는 레위인들이 거할 곳을 어떻게 주시는가 말입니다.

우리 생각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기 여기 어떤 곳이 레위지파가 거할 성읍이다라고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아래 성읍들과 그 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자기의 기업에서 이 아래 성읍들과 그 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그래도 이미 자신들의 땅이 된 것에서 남에게 준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우리야 잘 알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셨고 또 다 주실 것이기 때문에 일 부분을 레위지파에게 준다는 것이 뭐가 그리 기분 나쁘고 언잖은 일이 될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말이 쉽지 정말 그럴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방법을 사용하실까요?

사람을 기분나쁘게 해도 너무 기분나쁘게 하잖아요.

제비뽑아 레위지파에게 주는 땅이 석유가 펑펑 나는 땅이면 얼마나 배가 아프겠습니까?

그곳에서 양을 치면 엄청나게 양떼를 늘일 수 있는 초지라면 얼마나 배가 아프겠습니까?

레위지파만 아니면 내가 차지했을텐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라는 존재를 이스라엘 한 가운데 두셨습니다. 얼마나 화나고 짜증나는 일입니까?

이뿐만 아니지요.

이들에게 갖다 바쳐야 하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내 옆에 레위인들이 있다면 레위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하겠습니까?

없었으면 좋겠다. 이게 여기 있는 우리들의 생각아닙니까?

이 생각이 곧 무슨 생각과 닿아 있습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즉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깔려 있습니다.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에 말라기를 설교했었습니다.

말라기 3장8,9절을 봅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자신들의 수고와 땀으로 번 돈인데 누가 미쳤다고 십일조 합니까?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이방나라를 보아도 그렇고 이스라엘도 그렇고 모든 것이 자신들의 수고와 땀의 결실인데 어디에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느냐 말입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내가 수입을 얻게 되었느냐 말입니다.

십일조, 헌물, 웃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위인들 저들은 이들에게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래 더러워서 내가 조금 준다. 십일조는 안되고 이십분의 일은 내가 내 놓는다. 그래도 내가 양심이 있지.

이렇게 되니 제사장들도 수를 쓰지요.

좋은 고기, 떡은 자기들이 다 챙기고 병든 것 저는 것, 눈먼 것들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형식이야 완벽하지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래도 자신들을 먹고 살게 해 주는 근거가 되니 모양만 낼 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제사장들이 이용가치만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없습니다.

복을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자신들에게 여호와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들은 모두가 다 귀찮습니다. 오히려 왜 이런 것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까라는 원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놀라운 장치아닙니까?

열두 지파에게 기업을 주셨고, 그 기업가운데 제비뽑아 레위지파에게 나누어주시는 방법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자신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들임이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심술쟁이 아닙니까?

창세기를 보더라도 선악과를 왜 만들어 놓으셨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만들어 놓으셨느냐 말입니다.

처음부터 접근을 못하게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둘러 막으셨으면 안되시느냐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오직 관심은 자기 자신.

지금 현실이 고달프다 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고달프게 살지 않을 텐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을텐데..

왜 나를 태어 나게 하셔서 이런 삶을 살게 하시는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쫙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의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생명나무가 어떤 것인가를 전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도록 해 놓으셨다고 했지요.

지금 열두지파에게 기업을 주셔놓고 그 가운데 레위지파가 거할 성읍과 들을 제비뽑아 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자신들을 위해 있다고 말입니다.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도 , 자식도, 돈도, 직장도, 건강도, 국가도, 무엇이든지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업을 주셨으면 그것이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건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이런 사고에서 첫째 아담안에 있는 자들은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고린도 전서4장7절을 보면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대단하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구별합니다. 자신이 받은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6장19,20절에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런데 지금 이들의 모습은 개판입니다.

은혜를 몰라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피로 주어진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아마 오늘날 이런교회의 모습이 있다면 이런 교회 아무도 안 갈 것입니다.

본이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희한하지요. 왜 오늘날 목사들은 고린도교회같은 모습이 되자라고 가르치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렇게 가르치지요. 고린도 교회처럼 되면 안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모임은 고린도 교회보다 정말 교회다운 모습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파벌도 있지요. 교회에 파벌이 있으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그런데 이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파벌이 있으면 안된다. 파벌이 없어야 된다. 파벌 있으면 교회 아닙니까? 그리고 술 취하는 자가 있으면 안됩니까?

음행하는 자가 있으면 안됩니까?

자 이렇게 되면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어느 누가 보더라고 멋있는 모습이지요. 그야 말로 본이 되는 모임 아닙니까? 그야말로 세상의 빛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이런 교회 없어요.

성경엔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교회가 있어요. 십자가 피만을 믿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꿈꾸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그런 교회는 없어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성도들을 여전히 이 모양 이 꼴로 내버려 두시는 지를 이해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셔서 구원하셨으면 더 이상 악한 생각하지 않고, 나쁜 짓 하지 않고 , 그야 말로 착하게 살게 하시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느냐라고 원망합니다.

다시 원망이 나왔지요. 설교 시작 할때도 나왔고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얻는 것을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꿈을 꿉니다.

열두 지파에게 기업을 나누어 주었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하는데 왜 그 기업 중에서 제비뽑아 레위인들에게 나누어 주느냐 말입니다.

사람들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는지를 몰라요.

왜 우리가 여전히 죄가 드러나는 장에서 살고 있는지를 몰라요.

생명나무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믿고 전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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