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강해 24

푸른 섬 2011. 11. 27. 13:21

작성일 : 11-11-27 13:01
여호수아강해 24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

여호와만 섬기라



음성설교


여호수아24장1-18

이스라엘의 시작과 현재까지의 일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속한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지요.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서로 다른 나라 사람끼리 만나 이야기를 할 때 상대 국가를 멸시하면 상대가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나라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남의 자식 욕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우리 자녀들이 있는데 자녀들을 부모 앞에서 욕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요?

앞에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욕이 막 나올 것입니다.

감히 내 자식을 욕하다니?

아니면 대놓고 여러분을 욕하면 어떨까요?

집안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끼리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최씨네 집안과 박씨네 집안.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 놓고 무시합니다.

2절을 봅시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이런 이야기 왜 꺼냅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기분 좋습니까 나쁩니까?

이분 좋다할 사람 없습니다.

이 말 속에는 너희들은 모두가 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이었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 말씀 속에서 너희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 말이 이해가 안 되지요.

19절을 봅시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14절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렇게 여호수아가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백성이 어떻게 대답합니까?16절입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당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 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하나님 이심이니이다”

이렇게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어떻게 자신들에게 행하셨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여호수아처럼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여기에 대해 여호수아가 찬물을 끼얹습니다.

19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렇지요. 그야 당연히 우리는 정녕 여호와만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나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시 2절부터 우리들이 읽어 내려가 보면 과연 이스라엘이 여호와만을 섬길 수 있을까요?

성경을 대충 읽으면 그렇습니다.

그래 우리들은 조상들처럼 우상숭배하지 말고 여호와만 섬기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하시는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너희 조상들은 우상숭배자였다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이게 그냥 과거의 일로 끝나버렸다면 문제가 아니겠지요.

과거의 일이라면 왜 언급할까요?

지나간 과거를 언급함으로 현재 교훈을 주기 위해서일까요?

그렇다면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요.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과거이지요.

그런데 사람이란 그리 간단한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당시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조상 아브라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랍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오늘 본문이 언급하면 말씀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아시겠지요.

이 말씀은 곧 앞서 말씀 드렸듯이 너희들 모두가 다 우상숭배자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이 구절을 잘 보세요.

누가 이렇게 하셨다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뭘 했습니까?

뭘 했는지 3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까지의 모든 일들을 여호와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삭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걸어 다닌 흔적들은 모두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이 없어요.

이해되시나요.

우리가 볼 때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움직였지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과정 통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 어디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히브리서11장8-10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을 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이 본문은 마치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한 것이냥 나오지요.

맞아요. 아브라함의 대단한 믿음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이 본문을 가져와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히 만들어낸 믿음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자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히 만들어낸 믿음이 이런 믿음임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4절에 보면 이삭에서 에서와 야곱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십니다.

5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을 보냈다고 하시고 애굽에 재앙도 내리시고,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다고 하십니다.

6절을 보면 너희 열조를 이끌어 바다에 이르게 하신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기껏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짓이라고 부르짖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망입니다.

출애굽기 14장10-12절을 봅시다.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요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낫겠노라”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주 의도적으로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어디에 믿음이라는 것이 나옵니까?

여호와께서 오히려 이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다를 이끌어 애굽군대를 덮었습니다.

7절 한반부를 보면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이 이야기를 왜 할까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했나요?

원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원망. 이런 가운데 여호와하나님께서 이들을 인도해 주셨지요.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외에는 어느 누구도 약속의 땅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지금 여호수아의 설교가 그냥 과거를 나열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설교 같지 않습니까?

사도행전7장에 나오는 스데반 설교와 너무나 닮았지요.

8절에서는 요단 서편, 아모리 사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붙이셨고 그래서 너희들이 그 땅을 점령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절 시켰다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모압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고 할 때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케 하였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그 손에서 건지셨다. 뿐만 아니라 지금 가나안 땅 왕들도 너희에게 붙였다. 그래서 지금 너희들이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건축지 아니한 성습을 너희에게 주었다. 그래서 너희들은 너희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심을 먹는다.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 까지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오히려 죄인으로만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가 너희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아도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 아닙니까?

당연히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마음입니다. 자신들의 마음이야 그야 말로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엇을 몰라요.

여호와께서 믿음 주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심을 몰라요.

자신들의 결심, 결단이 과연 여호와를 섬길 수 있을까?

자신들의 결심이, 결단이 결코 여호와를 섬길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을 섬길 때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해요.

로마서5장8절을 봅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도의 출발점이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상황입니다. 우상숭배자입니다. 진멸대상입니다. 저주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성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죄인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 죄인이라는 것이 쏙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무엇을 자랑합니까?

자신은 죄인이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대신 죽으심을 자랑하고 앞장세우겠지요.

이것이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씀의 본래 취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리하니라”

사도바울이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키고 있습니까?

죄인에 위치시키고 있어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은 죄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언급하는 이유는 자랑거리와 관련된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들, 즉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 , 즉 하늘로서 제공된 그 십자가 죽음 외에는 다 죄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외에는 모든 것이 십자가와 원수관계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심이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지요.

인간들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자꾸 죄인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있지요.

십일조했어요. 기도 했어요. 성경 읽었어요. 전도 했어요. 말씀 열심히 묵상해요.

나 교회 열심히 나와요. 나 예수님 믿어요.

이런 것들을 열심히 내어 놓습니다.

마치 오늘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과 같습니다.

예수님 믿으라고 하니 믿고, 죄인이라고 하니 죄인이라 인정하고, 전도하라고 하니 전도하고, 기도하라고 하니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니 말씀 묵상하고.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은 무엇을 모르는 자입니까?

여호와께서 홀로 하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입니다. 즉 자신들이 죄인임을 몰라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몰라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다.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요. 오히려 십자가가 구원의 통로로 여겨요. 십자가는 거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너희들은 구원받을 자격 없다. 너희들은 모두가 다 지옥이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십자가를 구원의 도구라 생각합니다.

접근 방식이 이스라엘식입니다.

정말 주님의 열심에 사로잡힌 성도는 예수님의 피에 대해 감사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을 한번 봅시다.

지금 결단하고 결심해야 될 문제가 아니지요.

주님의 희생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내가 수고하지 않았고 농사짓지 않은 것을 먹게 하시고, 내가 건축하지 않은 곳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피 공로 때문입니다.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집도, 직장도, 풀도, 나무도, 해도, 달도, 어느 것 하나 십자가 피공로로 주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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