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강해 25

푸른 섬 2011. 12. 4. 13:02

작성일 : 11-12-04 12:47
여호수아 강해 25

죽음 그리고 우상숭배






음성설교


여호수아24장29-33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표지에 보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가?” 자신을 위한 삶이 우선순위를 정하는 법이라고 해 놓았습니다.

여기 있는 어른들은 모두가 다 인생의 절반쯤 온 사람들 아닙니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가?

그래서 저자는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 것은 과감히 버려라고 합니다.

그것이 직장이 되었든, 심지어 아내가 되었든, 남편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버려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가 이것을 권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를 행복해 주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만 채워라는 것이지요.

여행 가방을 예로 들면서 삶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기 위해 가방에 든 것들 중 과감하게 버릴 것은 버리고 소유할 것은 지혜롭게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편안하게 자신이 가진 재능을 열정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 나다운 나가 되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유가 아무리 많아도 그 우유를 다 마실 수 없다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일도, 물질도 , 소유도 아닌 그저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바람직한 삶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삶의 목적을 위해 자기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가방 정리했을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자기 행복입니다.

가족의 행복도 아닙니다. 남편의 행복도 아닙니다. 아내의 행복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정리했겠지요.

여러분도 정리하고 싶지 않습니까?

지겨운 직장, 힘든 가정, 애먹이는 자식 등등.

성경이야기보다 더 쏙쏙 들어오지 않습니까?

십자가 이야기 보다 더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왜 성경을 덮어 버릴까요? 왜 십자가가 장식거리로 전락했을까요?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성경을 덮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 가치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준다면 십자가를 멸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한 가지 아닙니까?

먹고 배부른 까닭.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주실 분.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주실 분이 예수님이기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지혜를 찾아서 뭐하겠습니까?

행복이지요. 자신의 행복을 위해 표적과 지혜를 찾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자신들의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성적으로 맞지 않아요.

본성적으로 맞는 것은 표적이나 지혜입니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가로 막는 것은 그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만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제거하고야 맙니다.

피를 나눈 형제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라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행복에 방해가 된다면 누구든 제거할 각오로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은 너무나 낯설게 다가옵니다.

죽음의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의 흔적을 거부합니다.

고린도 전서 1장26-31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잇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말씀이 어떻습니까?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행복, 나의 행복에 관심이 있습니까?

이 땅에서의 행복에 관심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관심 없습니다.

31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시지요.

이 말은 나는 어떤 자라는 말입니까? 미련한 자요, 약한 자요. 천한 자요, 멸시 받는 자요,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슨 자기 발견, 자신의 행복을 꿈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자랑하기 위해 성도는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 없는 자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기 어디에 자신의 행복이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까?

모든 것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 중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들이 자신의 행복중심입니다.

십자가는 이런 인간의 행복중심성을 집중포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습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그 책을 보면 누구나 공감할 내용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죽음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수아의 죽음, 엘르아살의 죽음, 그리고 요셉의 장사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여호수아서는 죽음으로 끝을 내려고 할까요?

31절을 한번 읽어 봅시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사사기를 읽어 본 사람들은 이미 다 알 것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고,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가 죽은 후 이들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우리 생각은 그렇지 않잖아요.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면 행복을 가져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살면 얼마나 큰 복이 보장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싫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능적으로 싫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찾을까요?

우상입니다. 이방신입니다.

열왕기하1장1-2절을 보겠습니다.

“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보라 하니라 ”

아하시야왕이 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이 낫겠느냐고 물어보라고 할까요?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이 없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왜 아하시야 왕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물어 보라고 했을까요?

여러분. 왜 신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질문을 할까요?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뜻 아닙니까?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은 아하시야왕의 소원을 들어 주는 신입니다.

여러분 절간에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 요즘 교회를 가도 그렇지요.

기도하면 들어주는 신 아닙니까?

아하시야 왕은 이것을 알았어요.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의 병이 낫고 싶다고 해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는 신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은 만만합니다.

자신이 빌기만 하면 들어 주시는 신입니다.

그러니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이 갖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렇지 않습니까?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이 다 갖고 있습니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조작물입니다. 그러니 신은 언제든지 인간의 욕망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의 욕망을 꺾으면 안 됩니다.

자신이 욕망을 꺾기 위해 신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를 비운다고요. 이보다 더 큰 욕망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자신을 못 비웁니다.

마귀의 생각이 가득한데 어떻게 자신을 비워요. 얼마나 큰 욕심입니까?

지금 아하시야 왕이 이런 탐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디셉사람 엘리야를 보내셔서 아하시야 왕이 죽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하시야 왕이 죽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난간에서 떨어져 병에 걸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에그론의 신 아알세붑에게 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 땡깁니다.

이 땡김을 인간들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우상이 좋습니다.

열왕기상14장22-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왜 이렇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사람들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 행했을까요?

딱 맞습니다.

입맛에 딱 맞아요. 원하는 대로 우상은 해 줍니다.

물론 기도가 응답이 되든지 안 되든지 문제가 안 됩니다.

어찌되었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규례를 주셨습니다. 장소도 정해져 있습니다.

복과 저주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마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내립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 믿는 것이 쉽습니까? 절에 가 부처 믿는 것이 더 쉽습니까?

십자가 믿는다는 것은 까다롭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내가 마음대로 믿겠다 고해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간은 누구나 갈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성을 바치면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됩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평안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접근 불가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 욕망이 십자가 사건을 발생시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십자가를 믿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형식적으로 걸어 놓고 예수님을 믿지요.

물론 이 예수도 우상입니다. 이 예수는 철저하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예수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 달라고 하지만 그 하나님이 뜻이 자기 뜻입니다.

자신의 욕망이요 자신의 바램입니다. 이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빌고 또 빌지요.

이해되시지요. 우상은 이렇게 사람이 갖고 놀기 쉽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하다는 것은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도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저놈들은 나쁜 놈, 우리들은 착한 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16장21-23절을 보겠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에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반대합니까?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곧 사단의 일입니다. 사단의 일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4장에 나오지요. 돌로 떡덩이 만드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받는 것. 세상 권세를 얻는 것. 이것이 사단의 일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싫습니다. 무조건 싫습니다. 죽음의 흔적은 싫습니다.

이유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사람의 일에 관심이 있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일엔 반대하는 것입니다. 결사반대입니다.

우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우상입니다. 멀리 있지 않지요.

사람이 우상입니다.

자기 자신을 섬기니 하나님의 일, 즉 십자가는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사라짐, 자기 부정은 자신에게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으시면 자신은 어떻게 됩니까?

자신도 산산조각 나겠지요.

이런 일만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읽으며 찾으리라”

사람들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지 누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잃으려고 하겠습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려고 하지 자신의 불행을 위해 누가 살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킬 사람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었어요. 자기 살기 바빴어요.

그런데 이 말씀을 누가 이루어내십니까?

예수님이 이루어 내셨습니다.

주님이 되셔서 성령을 주셔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뼈를 500여년 만에 세겜땅에 장사한 이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심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요셉의 뼈를 500여년 만에 세겜땅에 묻은 것입니다.

인간의 관심은 사람의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믿고 살아갑니다.

돌아다니는 모든 것이 우상숭배지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을 우상숭배지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우상이니 얼마나 섬기고 싶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린 죄인입니다. 우린 사람의 일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께서 하신일,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만을 전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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