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 강해 16

푸른 섬 2011. 10. 2. 14:57

늙었고 얻을 땅은 많도다

여호수아13장1-31

여호수아1장1-6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독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gpt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다시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뭔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여호수아 생애에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여호수아가 전쟁을 치룰 수 없는 입장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여호수아 1장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약속은 다윗 왕 때에도 이 모든 지역을 확보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도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은 성경을 볼 때 누구 중심으로 성경을 볼까요?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닙니까?

사람 중심입니다.

이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 중심으로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반드시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허풍쟁이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거짓말쟁이라고 할 것입니다.

분명 여호수아에게 평생에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 즉 땅을 반드시 차지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여호수아는 이제 늙었습니다.

늙었다는 말의 뜻을 말씀드렸지요.

이렇게 되면 무엇이 튀어 나올까요?

원망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야 워낙 겸손하시니 하나님 그래도 감쏴 합니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들을 절대로 감사합니다라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그는 그 말씀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건 여호와의 말씀뿐만 아니지요.

자신들의 탐욕을 알려주는 말씀이 들려지면 곧장 탐욕이 새로 발생합니다.

새로 만들어집니다.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기분 좋은 말씀입니까?

여러분들도 이런 큰 꿈을 가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해 봅시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동 전체를 주겠다고 하셨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요?

하나님 저는 아파트 전체동 필요 없고 한 채 만 있어도 만족합니다라고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죄인은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이상 이 탐욕을 포기 못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이 없었을까요?

왜 없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한번 보세요.

그들이 그렇게 꿈꾸고 꿈꾸던 세계가 있었잖아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죄인들을 이렇게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접하게 되면 곧장 그것을 이용해 자기 확장에 나섭니다.

특히 여호수아가 받은 말씀은 그야 말로 금상첨화 아닙니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 속에 꿈꾸는 바와 하나님 말씀의 일치는 그야 말로 바라고 바라던 아닙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경 말씀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합니까?

죄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 꿈입니다.

유일한 소망입니다. 간절한 바램이지요.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약시대라고 별 차이가 없습니다.

로마서12장19-20절의 말씀을 한번 볼까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참으로 멋진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나요?

말씀을 잘 보세요.

원수를 내가 안 갚아도 갚아줄 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엇만 하면 된다.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져 옵니까?

바로 그 원수의 심판을 가져 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5장2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고하 셨습니다. 22절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로마서 12장 19-20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원수에 대해 어떤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까?

저런 원수 놈은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마음이 있다는 말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지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말씀이 사람에게 떨어졌을 때 어떤 마음으로 이 말씀을 대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원수를 내가 갚지 말아야지. 주님께 맡겨야지. 나는 오히려 원수를 대접해야지.

이게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말과 예수님의 말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요.

둘 다 모두 한가지입니다.

두 말씀 모두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말씀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을 전하는 말씀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말씀, 자신 속에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말씀으로 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 속에 잠자는 거인이야 뻔 하지요. 마귀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이 말씀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죄인을 주님으로 세우는 말씀으로 바꿔치게 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12장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에서 주체를 주님으로 봐 봅시다.

즉 여기에서 ‘내 사랑하는 자’, ‘너희’를 주님이라고 바꾸어 봅시다.

바꿀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부터 해결해야지요.

바꿀 수 있지요.

성도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은 성도 자신이 부정된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신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로마서12장19,20절을 이렇게도 해석하겠지요.

원수를 직접 갚지 말아야지. 내 마음은 원수를 확 갚고 싶지만 참아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수가 주리고 목마를 때 먹이고 마시게 하기 싫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주님의 뜻이니 그렇게 해야 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움이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모두가 다 지옥가야할 죄인이 되어버립니다.

사랑하면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원수가 있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는 여전히 십자가의 피 능력만을 바라보도록 하시고 증거하도록 하십니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떼어 내 버리면 그래 내가 노력해 보겠다가 되는데 성경을 조각낼 수 있습니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성경을 조각잘 냅니다.

특히 큐티하는 사람들 보세요.

성경 읽고 은혜 받은 것을 나누라고 하면 성경을 산산 조각내 버립니다.

그러니 주님의 피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산산조각 낸 자리에 자기 자신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습니다. 자신의 왕됨을 성경말씀이 지지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더러 로마서12장19,20절 말씀에 대해 노력도 하지 말라 말입니까?

라고 따질 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노력하지 하지 말라 할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이 떨어졌다는 것이 이미 모든 죄인들은 이 말씀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빨려 들어가 하나는 지옥갈자로 하나는 천국갈자로 이 말씀이 갈라내 버립니다.

천국 갈자는 이 말씀이 주님의 피만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갈 자는 이 말씀이 자신을 더욱더 견고케 하는 말씀으로 보일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여호수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 들었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한다고요?

자신들 속에 잠자던 욕망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만들어 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적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여호수아가 늙었습니다.

더 이상 전쟁할 힘이 없습니다.

젊을 때에야 말씀 지키려고 하지요. 한 살 두 살 더 먹어 보세요.

말씀이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생존보다 더 우선인 것은 없습니다.

그럴 때 말씀이 어떻게 됩니까?

산산조각나 버립니다. 훅 날아가 버립니다.

얼마나 좌절하겠습니까?

얼마나 슬퍼겠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한번 보세요.

아직 얻을 땅의 남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리 이스라엘에게 분배해 버립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여러분 미친 짓 아닙니까?

땅을 차지하지도 못해 놓고 땅분배를 해버립니다.

무엇에 근거하여.

6절을 봅시다.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로봇마임까지의 산지 모든 거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땅을 조금 얻었는데 또다시 주리라고 약속만 하십니다.

그리고는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야 지금 시대를 사니까 별 느낌이 없지요.

오늘날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누가 그걸 봤습니까?

우리들 눈에 띄는 것 가운데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이 보입니까?

한군데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믿는 자들만 있지요.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행세하시는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것을 믿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 놈 미쳤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성도는 이런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왜냐하면 만날 말씀밖에 없어요.

약간의 흔적. 그래도 여호수아 시대에는 약간의 땅이라도 차지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어느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서 구약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더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니 좀 이상하지요. 구약이 더 확실하다.

이 말은 이렇게 조금은 얻어 놓고 나머지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더 확실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구약시대엔 조금 미친놈이지만, 신약시대엔 완전히 미친놈이 되어 버립니다.

심지어 로마서12장 같은 말씀을 보면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십자가의 피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니 미친놈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원수를 사랑해야지. 원수 갚는 것은 주님이 갚으신다 했으니 나는 원수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주어야지.

이렇게 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뭐라고요. 주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버리는 행위라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행전26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하니 베스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성도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합니다.

그러면 어떤 소리를 듣게 될까요?

네 만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네가 잘못 배워서 너를 미치게 한다.

이런 소리를 듣는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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