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다 목사다!

푸른 섬 2009. 8. 21. 07:35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겸손하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곳에 가면 목사나 성도나 다 일반이니 말이다.

목사라고 특별히 복음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목사 대우 해 달라는 사람도 없다.


늘 하는 말이 주님이 주셨으니 그 은혜로 복음을 전할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역전이 일어나고 있다.


늘상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별로 아는 것도 없고 아는 것만, 받은 것만 전할 뿐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그런지 목사 아닌 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여긴다.

십자가 복음을..


물론 십자가 복음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그 십자가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다 아는가에 대한 것이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땅의 인간이 죽을 때까지 알아가도 그 사랑의 깊이를 알 길이 없다.


단지 살면서 그 은혜로 날마다 그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 지를 알아갈 뿐이다.


그래서 성도에겐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성경이 왜 그리 두꺼운지 아세요?

죄의 깊이가 그만큼 깊고 주님의 사랑이 그만큼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되심이 제대로 증거된다.


복음을 접한 성도나 목사들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일 것이다.

사실 그렇다. 그 기분은 어떻게 표현 할 수 가 없다.


그래서 찬양도 나오고 감사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모이면 주님의 은혜요라고 하는데 그곳에 성도가 끼면 성도도 주님의 은혜라 말한다.


그런데 어느 날  성도들은 아는 것이 왜 그리 많은지 더 이상 목사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요한 일서의 말씀이 그러하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실상 목사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왜 그런고 하면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철저하게 가르치는 자의 부정을 위해 사용하신다. 왜냐하면 머리 되시는 분이 따로 있고 그분의 지시에 따라 눈은 눈의 역할, 팔은 팔의 역할을 감당한다.



 오래전에 이근호 목사님의 설교가운에 이런 예화를 잊을 수 없다.


교회에 어떤 집사님이 청소하고 계신다.

그래서 목사가 교회 청소하는 집사님에게 제가 청소할 테니 그냥 가세요라고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어디 감히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목사가 방해할 수 있느냐라고 하셨던것 같은데..


기억이란 내 중심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대략은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 주변은 거꾸로 되어 버렸다.

목사 아닌 성도가 내가 목사 할 테니 목사 당신이 청소하고 돈도 벌고 헌금도 하고 하시오 라고 말한다.


목사 입장에선 그렇게 하죠. 얼마든지 그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하면서 헌금도 십분의 일 정도는 정확하게 하고 그 이상을 헌금합니다. 청소도 하고, 설걷이도 하고.


목사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목사가 말씀에 있어서는 상수가 아니겠는가?

물론 그런 은사가 없으면 목사 아니다.


또한 목사가 실수할 수 도 있고 잘못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자기는 어떤가?

늘 완벽한가?


누구의 증인인가가 핵심이 아닌가.


나는 이번에 놀라운 모습을 보았다.

목사는 늘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는데 성도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말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억눌림에 대한 반작용일까?

기존교회에서 얼마나 목사에게 당했으면 십자가 복음 전하는 교회에 와서 십자가 복음 이용해 정 반대로 목사에게 그 행세를 하는지..


이것을 20년 동안 보아 왔다.


그러니 이런 풍토에서 목사가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기적이다.

왜냐하면 외부도 적이요 내부도 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도바울의 상황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부의 적 때문에 기분나빠 자기의 길을 간자도 있는지...


성경에 답이 다 나와 있는데 자신에겐 그런 부정적인 말씀이 해당 안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지..


그러나 여지 없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일수록 마귀는 더 활개를 친다.


인간은 첫째 아담의 본성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인가?

왜 그리 선생이 되려고 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려고 할까?

왜 자신이 꼭 앞장서야 하는가?


자신이 받은 것이 분명 따로 있는데 받은 것은 내 놓지 않고 받지 않은 것을 갖고 자꾸 목사 행세를 하려고 할까?


헌금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이요 청소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임을 왜 모를까?

왜 꼭 가르쳐야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할까? 이것만 소중할까?

물론 뽄떼나는 것이 좋아 보이는 것인 죄인의 속성이다.


그러다 보니 다 목사다.

십자가 복음을 성도에게 가르쳐 보면 다 목사다. 다 눈이다. 그러니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코도 없고 , 귀도 없고 이게 무슨 귀신같은 모습인가?


이렇게 되면 누가 누구를 핍박 하는고 하면 복음을 안다는 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를 핍박하게 된다.

어떻게?


목사가 설교하면 심판자로, 판단자로 서 있다.

오늘 제대로 설교하나 안하나.


설교시간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간이 아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내 죄가 드러나는 시간이다.


물론 목사가 주님께로 인도하지 않고 세상 복으로, 돈으로, 건강으로 인도하면 가만히 두면 안된다.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설교나 글을 읽을 때 왜 그런 글을 썼는지 파악하지도 못하고 초보적 기준을 갖다댄다.

내가 초보적 기준이라고 해서 이상히 여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 기준은 절대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 것이 주님앞에 지옥갈 이유라면 십자가 복음, 오직 주님의 은혜, 행위부정조차도 주님 앞에 지옥갈 이유가 얼마 든지 될 수 있다.

인간은 그 정도로 창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상한 심령도 흉내 내고, 애통한 것도 흉내 내고 십자가도 다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진심이다.

진심도 주님껜 역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열두 제자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1급장애인 같다.


그런데 이런 모임에서 십자가 복음이 계속 선포되고, 그 복음에 애통해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니 회개하라. 한풀이 하는 자여.-(                  )

회개하라 돈을 중히 여기는 자여.-(                         )

회개하라 자기 몸둥이를 사랑한 자여.-(                     )

회개하라 자기 자식만 귀히 여기는 자여.-(                    )

회개하라 자기 가정만 소중히 여기는  자여.-(                       )

회개하라 자기 시간만 아끼는 자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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